본문을 잘 읽으면 큐티가 쉬워진다

큐티를 위한 준비를 마쳤으면 이제 오늘의 본문을 읽어야 한다. 큐티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려면 문자로 기록된 성경 본문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 제대로 읽지 않으면 좋은 큐티를 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선 본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적어도 세 번은 읽자
큐티 본문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면 좋은데, 처음엔 소리를 내어 읽고 그다음에는 마음으로 읽고, 마지막으론 손으로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집중력이 생긴다. 귀로 들으면서 읽어 보자. 눈으로만 읽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음으로 읽는다는 의미는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기 위함이다. 의미를 되새기면서 두 번째 읽으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조되는 단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내용들이 보이면 마지막으로 별표와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 그으면서 손으로 읽어 보자. 본문의 내용을 촘촘하게 살피는 과정을 관찰이라고 하는데, 관찰을 잘하면 큐티는 반은 성공한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열려 있는 책이다. 순종을 위한 성경 읽기에 대해선 이미 말씀드렸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읽기만 해도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 읽기만 잘 되어도 큐티는 어렵지 않다.

큐티를 잘하는 사람은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다. 관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큐티가 어렵고 엉뚱한 데로 간다.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상한 묵상으로 빠질 가능성이 많아진다.

선입견을 버리고 읽자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상식이 관찰을 방해할 때가 많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을 보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본문을 잘 읽어 보면 ‘무리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무리’라는 단어를 보지 못하게 만든 좋은 예이다.

무리가 누구인가. 한 조각의 떡을 얻어먹으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다. 무리에게도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선입견을 버리고 읽으면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을 잘 읽으면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나가 정확하게 보인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 유명한 본문의 경우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본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 묵상을 하게 된다. 함정에 빠질 위험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큐티를 위해 펼치는 본문을 오늘 처음으로 읽는다는 생각으로 대해보자. 우리의 큐티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더하거나 빼지 말고 읽자
요한복음 21장 25절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모두 기록하면 분량이 많아 세상에 둘 수 없다. 성경책에 기록된 내용은 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은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경고하신다.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은 성경의 원본을 두고 하는 얘기다.

우리는 원본 성경의 무오성과 충족성을 믿는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지기까지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강력하게 보존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낱말 하나, 조사 하나도 대충 보고 넘어가면 안된다. 본문을 읽고 관찰할 때는 하나도 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인데 많은 성도들이 좋아하는 본문이다. 한 절만 보면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슈퍼 맨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처럼 보이지만 문맥을 따라 앞 구절을 읽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마치 불가능은 없다는 식으로 읽으면 안된다. 내가 보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처음 읽은 것처럼 읽자
찬송가 235장의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가사처럼 혹시 낡고 헤어진 성경을 가지고 있는가. 펼치면 노란색 빨간색으로 빼꼭한 틈이 없이 줄쳐져 있고, 메모 되어 있어 그 책을 가보처럼 가지고 계시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다. 손때 묻은 성경이어서 너무 좋은데, 본문을 펼치면 예전에 읽고 은혜가 되어 줄 그어 놓은 부분이 먼저 들어오지는 않는가. 처음 읽는 설레임이 사라질 수 있다.

성경을 가끔 바꾸면 어떨까.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성경은 따로 보관하고 새로운 성경을 구입해서 읽으면 큐티에 큰 도움이 된다. 아니면 다달이 나오는 큐티 교재를 사용해서 큐티를 해도 도움이 된다. 매일 아침마다 백지 위에 새롭게 기록한 것 같은 말씀을 펼치는 설레임 경험해 보면 어떨까.

연애편지처럼 읽자
연애편지를 받아 본 일이 있는가. 요즘은 낭만이 사라졌다. 문자나 카톡으로 오는 메시지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 있다. 종이 냄새, 손 글씨의 매력, 기다림이 주는 설렘. 연애편지를 받으면 누구나 조심스레 봉투를 찢고 편지를 꺼내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 주어와 접속사와 토씨 하나까지 주의 깊게 읽으며 그것에 담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 왜 이 단어를 썼는지,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따져 보지 않는가. 성경을 읽을 때도 연애편지 읽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 수박 겉핥는 식으로 읽으면 안 된다.

마치 연애편지를 읽을 때처럼,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성경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궁금해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에게 보내는 연애편지가 성경이 아니든가. 연애편지를 받을 때의 설레임으로 말씀을 펼치면 그 속에서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큐티는 본문을 어떻게 읽는가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 본문을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오랜 큐티를 통해 나름대로 터득한 필자의 경험이기도 하고, 하워드 헨드릭슨 같은 유명한 성경 주석학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바라기는 이번 글이 관찰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