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소명을 넘어 사명으로

올해 대학에 입학한 막내딸이 학교 과제라고 하면서 나에게 인터뷰를 청해왔다. 우리 가족은 언제, 어떻게, 왜 뉴질랜드로 이주를 해왔느냐 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목회를 위해 목사로서 가족과 함께 왔다는 등의 대답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자꾸 누가 불러서 왔느냐 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되묻는다.

하긴 이 아이는 내가 뉴질랜드에 이주해 올 때는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막내딸은 우리 가족의 뉴질랜드 정착사의 실체를 이제서야 들으면서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듯이 매우 진지했다. 누가 뉴질랜드로 불렀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이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성도들, 즉 교회의 부름으로 이해했을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잘 받아들였을까? 그 사이에서 나도 조금은 혼란스러워했으니 아이는 오죽했을까 싶다.

가볍게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에 나는 오히려 더 진지해졌다. 누가 불러서, 즉 누구의 부름으로 왔느냐는 질문이 내 가슴 속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소명, 즉 부르심은 반드시 사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소명보다는 사명이라는 단어가 더 먼저 찾아지지만, 목회와 선교에서는 소명이 먼저다. 목회와 선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며,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고, 또한 선교는 성령의 오신 목적이기 때문이며, 목회와 선교는 교회와 신자의 본질적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믿는 자들은 선교의 소명을 들으며 사명을 따라 평생 순종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경을 넘는 소명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0:16)

뉴질랜드의 가을이 깊어지면서 햇과일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과수농가들이 가장 바쁜 시기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지역을 넘어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분명한 소명을 들었다. 이 부르심이 사도 바울의 귀에 일생동안 들려왔기에 일생을 선교사로 보냈다.

예수님 역시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복음 4:35)고 말씀하신다. 익은 들판의 곡식이 비록 육의 음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두는 자를 부르는 소리를 내고 있음이 아닌가? 선교의 소명은 일차적으로 국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다.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희어져 큰 수확이 있을 추수기도 별로 없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추수할 자를 부르는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아직 복음이 이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도우라’(행16:9)는 지경을 넘어 우리를 부르는 부르심에 외면함은 하나님 앞에서 주신 사명을 못 본 척하는 큰 불순종이다.

위로부터의 소명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부르시는 소명이다. ‘주께서 올리워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이다. 교회의 머리 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지역으로 일군을 보내시기를 원하신다.

마가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고 명령한다. 이 명령하신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교회에 반포하시고 아직도 그 명령은 철회되지 않으셨으며, 그 과업은 아직도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부르심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부르며 손짓함이 틀림없다. 주님께서 이 명령을 승천하실 때 주셨다면, 주님은 아직도 그 명령을 하늘 보좌에서 발하고 계신다. 우리는 결코 그런 부르심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음부에서 들려오는 소명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누가복음 16:28)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나오는 이 부름을 좀 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절규하는 외침소리’다. 이 외침은 지옥에서부터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소리다.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외치는 저들의 호소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외침은 우리의 영혼을 뚫고, 우리의 귀에 계속 울려오는 소리다.

영적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성경을 통하여 되돌아오는 울부짖음에 어떻게 무감각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지옥에는 희망도 없고,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영혼들도, 부자 영혼과 같은 비슷한 소리를 할 것이다. 세상에 있을 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보내어 이 고통스러운 장소에 오지 않게 증거해 달라고 얼마나 울부짖겠는가?

죽은 자들이 부르는 그 소리는 살아 있는 자들이 응답하여 이루어 줄 수밖에 없다. 복음 없이도 이교도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누가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을 하고, 선교사 파송에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마음 중심으로부터의 소명
“성령을 소멸치 말며”(데살로니가전서 5:19)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쉽고도 분명하게 우리 내부 의식에 알게 해 주는 성령의 특별한 개인적 부르심이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다른 사람에 의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약 외부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때까지 우리는 이 내적인 부르심을 들을 수가 없다.

앞서의 세 가지 부르심을 외면했다면, 성령께서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부르심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속삭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며, 외부의 부르심에 귀 기울여 듣고 또 생각하고 있다면, 때가 이르면 내적 부르심을 확실하게 듣게 될 것이다. 너는 가서 모든 나라를 가르치라. 너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에로 부르신다. 오늘도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런데 순종하여 사명으로 이어 나가는 사람들은 적다. 왜 그럴까? 일시적인 종교적 감정과 성령의 내적 부르심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심 없이 행하는 선교사들이 분명히 있고, 누가 그런 사람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사들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바요, 그래서 답답할 때가 있다. 소명, 그 거룩한 부르심을 듣고 깊은 사명에 불타오르는 모습에서 선교는 열매를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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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