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쓴 시(詩), 자화상, 껍데기는 가라

해마다 4월이 되면
해마다 4월이 되면 벌써 50여 년이 지나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1969년의 4월이 생각난다.

그 해 1969년은 미국이 쏘아 올린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고 지구 저쪽 사람들은 금방 달나라에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이 들썩거리던 해였다.

그렇지만 한국에선 재선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해였다. 미국이란 거인은 우주 정복을 위해 아폴로란 커다란 공을 쏘아 올렸고 한국이란 난쟁이는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이란 작은 공을 쏘아 올린 해였다(세월이 흐른 뒤 이 작은 공은 소설가 조세희를 통해 소설로 태어난다).

그 해 대학교 3학년이었던 우리들 모두에게 1969년은 어수선하기만 한 해였다. 60년대의 마지막 해인 그 해를 어떻게 보내야 코앞으로 다가온 70년대를 제대로 맞이할지 당황스럽기만 했고 그 70년대를 끌고 오는 이 60년대의 마지막 물결이 지나가기 전에 무언가를 이루어 놓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어깨를 짓누르던 해이기도 했다.

신동엽 시인의 죽음
그러나 무엇보다도 1969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에게 들려왔던 슬픈 소식은 신동엽 시인의 죽음(1969년 4월 7일에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심)이었다. 4.19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던 저항 시인이기에 4.19의 시인으로 불렸던 신동엽 시인의 죽음은 우리들 가슴에 작지 않은 파동으로 몰려왔다.

4월이 되면 60년대의 대학생들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 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로 시작하는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구호처럼 중얼거렸었는데 그 4월에 40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병마에 휩쓸려 세상을 떠야 했던 시인의 죽음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3선 개헌의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지며 흉흉하기만 했던 1969년의 봄은 교정 사방에서 핏빛으로 피어나던 진달래꽃 가지 사이로 몰려왔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60년대의 마지막 해를 맞았던 그해 4월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어느 사이 우리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신동엽 시인의 시가 신음처럼 토해져 나왔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70년대라는 불안한 뱃머리에 올라타고
‘껍데기는 가라’를 외치며 우리들은 데모에 나섰고 ‘껍데기는 가라’를 부르짖으며 우리들은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했지만 가장 잔인한 달인 4월의 봄은 갔고 연일 계속되던 데모로 최루탄 가스와 돌팔매가 대학로의 허공을 가로지르던 여름도 지나갔고 1969년 그 가을에 삼선개헌은 국민투표란 요식행위에 의해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렇게 6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69년은 지나갔고 60년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70년대가 왔고 그 70년대의 첫해에 우리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껍데기는 가라’를 외치던 우리는 모두 4학년이 되었지만 아무런 준비도 못 갖추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준비도 사회로 나아갈 준비도 못 갖추고 있었던 우리는 모두 사실상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떠밀리듯 70년대라는 불안한 뱃머리에 올라탄 우리들은 육지로도 바다로도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군대에도 갔고 취직도 했고 결혼도 했다. 그런 모두에게 69년은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고 해마다 4월이 되면 4.19의 시인이며 40살도 못 채우고 4월에 돌아가신 신동엽 시인을 생각했고 그의 시(詩) ‘껍데기는 가라’를 회상했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진달래가 1969년 그 교정에서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해 4월, 이미 40살이 훨씬 넘었던 나는 그 시인의 시를 생각하며 ‘자화상,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詩)를 썼다.

자화상,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어느 시인의 외침 따라
껍데기는 가라
덩달아 소리쳐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껍데기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때론 여럿이 때론 혼자서
껍데기는 가라
소리쳐 부르짖으며 걷던 길은 외길이었는데
지금은 혼자 돌아와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아직도 어디선가 소리 들리는 것 같아
껍데기는 가라
귀 기울여 들어보면 예전의 그 소리가 아니기에
아무도 없는 갈림길 앞
식은땀 둘러쓰고 혼자 서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그 시(詩)는 이미 전설이 되어있고
껍데기는 가라
시(詩) 속의 아사달과 아사녀는
사람들 가슴 속에 사랑이 되어있는데
소리만 부르짖다 껍데기가 된 사내
갈림길 앞에 혼자 서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얼마나 더 소리쳐 부르짖어야
껍데기는 가라
그 부르짖음이 사랑이 되어
가슴 속에 들어와 시(詩)가 될 수 있을까
아직도 생각만 하며 혼자 서 있습니다.
발 한걸음 못 내딛고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40살이 훨씬 넘은 어느 해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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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