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安命) – 부득이(不得已)한 명에 편안해하다

그것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아 명(命)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安之若命)은 오직 덕(德)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 본래 어찌할 수 없는(不得已) 바가 있는 것이니 오직 사정에 맞게 행동하고 자신을 잊어야 한다. <인간세, 18>

장자는 모든 세계의 작동원리를 ‘명의 운행’으로 보았고 그 자체를 완전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일들, 즉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인과관계도 알 수 없고 이를 변경시킬 방법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마땅히 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편히 살라고 한다.

우리는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성별을 선택할 수 없다. 집안 배경도 선택할 수 없으며, 재능도 선택할 수 없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흔히 이야기하는 성품과는 다른 기질도 선택할 수 없고, 심지어 나의 식성조차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낳아준 부모를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삶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면 분노와 불의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바꿀 수 없기에 때로는 우리는 이러한 것을 운명이라 한다. 더욱이 이러한 명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될 때 인간은 큰 좌절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운명은 제약이자 동시에 고통이며 슬픔이다. 장자의 안명은 이처럼 죽음을 포함한 우리의 삶에 대한 크나큰 제약으로 다가온 모든 부득이한 상황에 대한 자세이다.

하지만 장자의 안명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체념적으로 안주하는 숙명(宿命)과는 다르다. 장자가 말하는 명의 운행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고, 사업을 성공시킬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바다의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가 바닷속에서는 어디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바다 밖으로 나와서 살 수는 없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란 물고기에게 바다와 같은 분명한 한계가 있음과 같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장자는 명을 결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있는 상관성으로 이해하여 그 결과 속에 자신을 편안히 맡기는 태도이다. 즉, 우리의 삶을 명의 운행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억지로 거역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 변화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장자는 이렇듯 터무니없고 고통스러운 운명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라는 화두로 고민하였고, 이는 내편 전체에 흐르는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라 하겠다. 즉 장자가 추구하였던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불행한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이 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장자의 자유는 철저하게 정신적 영역에서 추구되는 경향이 있다.

명으로 주어진 사태는 그대로 둔 상황에서 그 사태에 대한 ‘무용지용’과 같은 의식의 전환(사고 뒤집기) 혹은 ‘심재’,‘ 좌망’과 같은 자신을 비움으로 ‘현해’내지는 ‘소요’의 정신적 초월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편 전체를 구성하는 장자 사상의 결론은 도를 통한 부득이 한 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삶의 자세인 안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안명론은 운명에 대한 장자 철학의 특징을 잘 반영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주어진 삶을 즐겨라
대략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사유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되면서 던져 진 중요한 질문은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표면적으로 일치된 대답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삶’이었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 속에 고대 로마의 호라티우스(BC 65~8)는 그의 송시(Ode) 중 결론을 “오늘을 즐겨라, 최소한의 미래를 기대하면서”(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로 노래한 시가 있다. 이 말을 ‘현재를 즐겨라, 내일은 모른다’라거나 혹은 ‘인생을 즐겨라, 내일은 없다’라고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은 행복한 시간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는 당시의 철학사조인 헬레니즘 사상인 현재의 미를 통해 이데아의 미를 추구하는 절제된 삶, 고결한 정신을 지향하는 것으로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닌 건전하고 도덕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고심한 행복한 삶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는 ‘자족’(autarkeia)이다. 이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에 대해 만족하라는 개념으로 ‘행복한 삶’은 자족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울 사도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말씀과도 연결되어 진다. 자족의 개념은 내적인 자유, 자립, 우월성을 뜻하는 것으로 장자가 소요유에서 말한 소요의 의미와 결이 같다.

성경에서 장자의 안명과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과 비슷한 단어를 굳이 고른다면‘안식’(安息 솨바트)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이 안식의 날이었다.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의 ‘안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안식’은 단순히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인간의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발휘되고 드러났을 때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순종하며 효과적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며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삶의 향유 – 낙(樂)을 누리는 것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도서 3:12-13)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도서 3:22)

전도서에서 주어진 삶을 기쁘고 즐겁게 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여덟 번 등장한다(전도서 2:24; 3:12-13, 22; 5:18-19; 7:13-14; 8:15; 9:7-10; 11:9-10). 이는 코헬렛이 현실에서 한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관찰한 후 결론으로 제시한 삶의 태도이다. 이번 글에서는 전도서 3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전도서 3:13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24)와 같은 맥락에서 삶의 향유를 이야기한다. 다른 점은 ‘하나님의 손’과‘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코헬렛이 주장하는 삶 향유의 근거는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선물’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의 손’은 구약성서에서 자비로운 신적 보호를 의미하기도 하고(시편 31:5; 이사야 50:2), 만물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도 한다(잠언 21:1; 이사야 66:2).

또한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좋은 것을 의미한다. 먼저 삶을 즐길 수 있는 기초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단순히 숨을 쉬며 사는 삶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원하셨다. 그 풍성한 삶은 부귀영화나 권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 시작이 누구에게서 오느냐를 앎에 따라 영적인 삶이 달라질 수 있음을 코헬렛은 언급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가? 전도서 3:1-11의 진술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일어나고,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한다. 특별히 이는 인생의 모든 ‘때’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선포하고 있다. 즉,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시작으로 사랑할 때, 증오할 때, 전쟁이 날 때, 평화로운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코헬렛은 이를 통하여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장자의 언어로 ‘도’라는 우주적 질서와 그 흐름 속에서 ‘명’이 결정되어 운행되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호라티우스와 같이 인생 전체를 향유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단지 기쁘고 즐거운 시간뿐만 아니라 비참하고 절망적인 순간들까지도 향유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전도서 3:22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인생들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이다. 코헬렛에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그 사람의 ‘몫’이다. ‘몫’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무작위로 주어진 몫’(share distributed by lot)을 의미한다. 즉, 이 ‘몫’은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손’과‘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피하고 싶은 부득이한 삶마저도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코헬렛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지혜로 파악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우리의 삶뿐 아니라 모든 사물의 변화가 하늘에서 주어진 ‘명의 운행’에서 비롯함을 깨닫고 그것에 편안해하는 장자의 ‘안명’과 같은 개념이다.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전도서의 결론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으로 말하지만, 코헬렛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안식의 개념과 같은, 즉 신비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 경외’(전도서 3:14)를 말한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다음 지면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PS.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신이 너와 나를 위해 / 과연 무엇을 준비해 두었는지 물으려 하지 말아라 /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기에 … 무엇이 어떠한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라 …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 시간은 우리를 시샘하여 멀리 흘러가 버리니 / 오늘을 즐겨라, 최소한의 미래를 기대하면서”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