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간과 그 시간에 한 인간이 늘 있었다. 그곳에 가면 그를 찾아가라는 말은 전설이 되었다. 1950년 말부터 일본에서 폐선이 된 300톤급의 어선을 수리하여 한국인 선원을 태운 원양어선은 낯선 북반구의 한국 부산을 떠나 북회귀선을 지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태평양 적도를 넘어 남회귀선을 지날 때 막연한 두려움과 새로운 섬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하면서 긴장감으로 살이 떨릴 만큼 강렬했으리라.
길고 긴 항해를 하고 나서 오징어잡이로 만선을 이루고 짧은 3일 동안 웰링턴 로우 허트항에 선원들이 내렸다. 선원들은 선원회관으로 달려가 퍼시 스미스 사관을 찾아가면, 이미 한국 원양어선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스미스 사관은 검은 정장을 입고 1975년 이후부터 1990년 대 웰링턴에서 한국 원양어선 기지가 철수하기까지 한국 선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국인과 스미스 사관의 만남은 한국전으로 이어진다. 한국전에 뉴질랜드군 군목으로 온 스미스 사관은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참전한 뉴질랜드군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었다.
1950년,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추위와 굶주림보다 더 큰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가는 한국인은 전쟁 가운데 버려진 처지였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배고픔을 채워줄 밥은 어디에도 없고 당장 살아남아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더라도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 가운데 남태평양으로 가는 원양어선에 선원으로 나선 한국인이 웰링턴 항에 내리는 것을 본 스미스 사관은 하나님이 버린 나라에서 찾아온 한국 선원을 돕기 시작했다.
1960년을 보내고 1970년 대에 오면서 한국 대사관이 열리고 원양어선 기지의 역할이 커지면서 한국인이 조금씩 늘었다. 콜롬보 플랜으로 온 한국의 인재들이 교육을 받고 월남전 패망으로 베트남 난민과 같이 온 한국인, 그리고 1980년부터는 여러 형태로 웰링턴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모아 선원회관에서 예배드리고 한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스미스 사관.
1979년부터 정기적으로 시작한 웰링턴 한인연합교회에서 거주 한인과 원양어선 선원에게 복음을 전한 스미스 사관은 1984년 3월 교회를 뉴질랜드 종교성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김용환 목사 가족을 청빙하여 1985년 10월에 아름답게 이임했다.
1980년부터 후반까지 스미스 사관을 도와 통역을 했던 고금숙 씨는 스미스 사관이 한인 선원과 거주자에게 복음을 전해 결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증언한다.
2025년이 되면서 한국전 발발 75주년을 맞았다. 한인이 뉴질랜드에 정착하는데 마중물이 되었던 퍼시 스미스 사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수고와 헌신에 감사하고 그를 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