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 운동

신도는 고대 일본인의 가미(신)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기원되며, 가미는 신격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미에 대한 신앙은 고대 일본의 정치 권력의 발달과 함께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정치 신화가 형성되면서 천황의 권력이 절대화되어 갔고, 천황의 선조 신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역사적 영웅을 신사에 봉제하여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국가신도는 처음부터 천황 중심주의와 그것을 옹호하기 위한 무력주의의 깊숙한 연계 속에 출발하였기 때문에 천황제와 군국주의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 이용되었다. 일본은 1877년 신사를 종교로부터 분리 시킨 후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을 자신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신사를 통한 일본화 작업을 양면으로 추진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신사를 교파로 삼고 있는 일본의 교파 신도를 한국에 침투시켜 포교를 통해 신도화 작업을 추진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신도를 통해 한국인을 신사화 하려는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제일 우선순위에 둔 것이 교육정책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의도하는 목적대로 교과 과정을 개편해 국민의례와 애국사상의 고취방법으로 신도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의 정책이 공립학교에서는 신사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미션스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신사참배가 처음부터 문제시되었던 것은 기독교 학교였다.

1920년 9월 선교회는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우리는 기독교 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천황예배를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삼는 의식에 참여케 하 여 폐하의 사진 앞에 경례를 시키는 명령에 대해서는 일체 이를 반대하고자 한다. 폐하를 신 또는 신과 같이 지고자로 예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요구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평안남도 지사는 1935년에 도내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를 할 것을 명령하고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모두 폐교조치 할 것을 지시했다.

일부 학교와 선교부에서는 애써 세운 학교가 폐교당하고 이로 인해 선교를 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일제의 요구에 응하였으나, 남장로 선교부의 단호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후에는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선교회의 기독교학교는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폐쇄한 기독교학교 (1937년)

남장로교선교부광주숭일남중, 수피아여중, 목포영흥남중, 정명여중, 순천매산학교, 전주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군산영명학교,
  
북장로교선교부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의여중, 대구계성, 신명학교, 재령여신학교, 선천신성학교, 선천보성학교, 강계영실학교, 서울경신, 정신학교.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학교도 폐쇄)


캐나다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미션스쿨의 운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를 이용하여 한국교회의 일치를 깨는 계획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주기철, 이기선, 길선주 목사를 사전에 검속한 후, 한국교회 각 교파에 압력을 가하므로 강압에 못이긴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끊임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주기철,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평북 신의주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경남지방에서는 한상동,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을 중심으로,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200여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성도가 투옥되었고, 약 50명의 교직자들이 순교 당하였음에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그칠 줄 몰랐다.

실제로 일제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선교사의 완전추방이었으며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당하자 자신들의 계획대로 한국교회를 완전 장악한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대량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윌리암 블레어 선교사가 그의 Gold in Korea에서 증언한대로 “1945년 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S.H.Moffett 역시 The Christian of Korea에서 그 처형의 날짜가 8월 18일이었다며, 그 진실성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그 계획했던 날 3일 앞서 한국을 해방시키심으로 하나님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유일신앙을 지켜온 한국민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은 신사참배가 한창 강요되던 그때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민족의 해방과 분단, 북한교회의 수난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 3국은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고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결정하였다. 1944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이 이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지도자들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유했으나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그 해 8월6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그리고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져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한 소련은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틀 후인 8월8일에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고 동북 만주와 북한을 무력 점령하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15일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 점령한 소련 공산당세력의 북한기독교 말살 정책
1945년 8월15일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한국 민족은 소련과 미국의 개입 하에 남과 북이 분단되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민족적 사회적 사상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신사참배 반대로 압박과 설움을 겪었던 북한 교회는 더 가혹하게 소련 공산주의의 탄압 속에 그 존폐의 기로를 맞게 되었다

한국의 38선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은 민족주의자이며 우익세력의 지도자였던 조만식을 내세워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같은 비율로 참가하는 평남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 5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해 군정을 실시하다 얼마가지 않아 조만식 장로를 배제시킨 후 젊은 소련군 장교 김일성을 앞세워 북조선임시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산주의 체제로 정비해 나갔다.

공산세력은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공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북한의 교회와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김일성 세력간에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교회 지도자들에 의한 기독교사회민주당 조직이나 신의주 사건, 교회의 3.1운동 기념행사, 그리고 일요일 선거반대 운동 등은 모두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전개세력과 대결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초부터는 북한정권이 북한의 각 종교 사회단체 대표를 초빙하여 그들의 정치노선을 지지 할 것을 요구하는 모임을 가지며 종교계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는 강양욱, 홍기황, 홍기주 등 종교계 대표들이 포함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공존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처리하지 않으면 북의 공산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회 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일은 용의주도하게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기구를 조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산당은 1946년 한경직을 중심 한 신의주의“사회민주당”과 김화식을 중심 한 평양의“기독교 자유당”을 잔인하게 박해하여 김화식과 동료들이 옥사하거나 사라졌다.

둘째는“기독교 연맹” 통해 교회를 예속화 시키는 일이었고, 마지막은 기독교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일이었다. 먼저 종교단체가 가지고 있는 토지와 건물을 몰수하여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기독교 연맹”을 통해 교회 조직을 분열시키거나 종교활동을 조정 방해하고 성직자 및 지도자들을 납치하거나 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