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心齋)와 ‘좌망’(坐忘) 그리고 ‘오상아’(吾喪我)

안회가 “심재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리고 소리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나아가서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야 한다. 귀로도 듣지 않고 마음으로도 듣지 않도록 생각을 멈추면 허(虛)의 상태가 된다. 기라는 것은 허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도(道)는 허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 허가 심제이니라.”<인간세 12>

어느 날 안회가 공자에게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 하였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는가?” 안회가 말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 형체를 떠나 지식을 버리면 위대한 도와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 이를 일러 좌망이라고 합니다.”<대종사 38>

장자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중요한 방법은 심재(心齋), 좌망(坐忘), 오상아(吾喪我)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심재는 ‘마음을 비움’으로, 좌망은 ‘앉아서 잊음’으로, 오상아는 ‘나를 잃어버린 나’ 등,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 설명되곤 한다.

심재는 글자 그대로 마음을 ‘재계’(齋戒) 한다는 의미이다. 재계란 중요한 제사의식을 앞둔 사람이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음식과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심재는 이러한 의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씻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신중히 하는 것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마음속 욕망을 씻어낸 공허한 마음으로 앞서 언급한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감각적 욕망을 비워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수양으로 이를 통해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한편「대종사」에서는 안회는 ‘좌망’ 함으로써 공자보다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 졌음을 보여준다.

안회는 좌망을 통해 자신을 잊어 결국 도와 일치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물론 여기에서 좌망은 반드시 앉아야만 하는 행동을 강조한다기보다 좌망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무엇까지 잊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앉아서 잊게 되는 대상은 외부의 것들을 비롯하여 나의 몸까지도 포함된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상아(吾喪我)와 연결되어진다.

심재와 좌망은 왜곡된 실상을 벗어나려는 지향성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심재는 내적 차원으로 마음을 비우고 고정관념을 비워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고 좌망은 외적 차원이 주가 되는 육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욕망과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고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림으로 도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심(成心)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도서 9:3>

코헬렛과 장자의 사상은 삶 자체에 대해 고뇌하는 철학이다. 때문에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논제를 진행하면서, 먼저 거시적인 대상인 우주와 자연으로부터 시작해 인간과 관련된 삶과 본질을 거쳐 인간을 둘러싼 역사와 사회 등을 관찰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코헬렛은 하나님 외적인 대상들을 탐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계속되는 부정적 결론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이 점이 전도서를 인문학적 철학사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전도서는 철학적 논제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탐구가 진행되고 있다. 코헬렛은 장자와 같이 마음이 외적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즉 마음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기관인 셈이다. 또한, 마음은 대상의 인식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감정이 생겨나는 곳이자 표출의 기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을 장자는 ‘성심(成心)’으로 코헬렛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칭한다.

먼저 성심은 언뜻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 사람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노력의 결과로 성취의 열매를 맺게 되면 기뻐한다. 장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사람들에게 있어 목표 달성의 종류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부귀를 얻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이에 따라 난세를 평정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러하기에 성심은 자신의 마음에 특정한 틀을 구축하고,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분별하려는 마음으로 부자유스러운 마음이다. 달리 말하면 성심은 억지로 분별을 만들어 내어 견고하게 만들어진 마음이요, 그 틀에 따라 살려 하고 얽매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고정된 마음이다. 고정된 마음은 쉽게 편견과 선입견을 낳는다. 그러하기에 장자는 그러한 마음의 성찰을 심재와 좌망으로 극복하려 한 것이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결국은 ‘악이 가득한 미친 마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장자에 비해 훨씬 자극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코헬렛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절대적인 부패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노력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본질과 삶의 진정한 의미는 전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코헬렛은 시사하고 있다.

신약의 코헬렛 격인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대한 권면을 시작하며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마음의 문제이다. 특별히 로마서12:1~2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도래한 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바울은 가장 먼저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한 예배라고 권면한다.

장자의 언어인 심재와 결이 같은 주장이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마음은 장자와는 달리 이 모든 과정이 수양을 통한 자신의 통제 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성령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고린도전서 2:16)에 의해 형성된 마음이다. 성령의 능력은 로마서 8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4~6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아브라함의 산 제사!
성경에서 장자의 심재와 좌망, 코헬렛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바울 사도의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은 인물로 가장 먼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본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선택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창세기 12:1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첫 마디는 히브리어로 “레크 르카”이다. 이를 직역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라, 너 자신을 위해서!”이다. 이는 하나님이 시험하는 첫 번째 요소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구어놓은 안전장치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시험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이 명령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다. 즉 장자가 말한 ‘오상아’ 즉 아브라함은 아브람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의 종착역은 모리아산 꼭대기에서 섰을 때이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시험은 장자가 말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함과 코헬렛의 이해할 수 없는 ‘하벨’의 총합이다. 좀 더 쉬운 언어로 표현하면 ‘비합리적인’이다. 백 살도 넘어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그의 마지막 시험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삭을 통해 자손이 밤하늘의 뭇별들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다음 불태워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반항도 없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하고도 반나절을 더 가는 길을 아무 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다.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이 길은 결코 평범한 여정이 아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의 여정이 하나님에 대한 부득이함과 하벨의 삶으로 날마다 불안에 떠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은 일체의 이성, 일체의 인간적 타산, 곧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수고 버리는 무한한 심재와 좌망인 자기부인의 영역이다. 아브라함이 어린 아들과 함께 번제에 쓰일 나무를 나귀에 싣고 그를 바칠 모리아산을 향해 길을 떠났을 때 그는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셈이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는 말을 아브라함 자신은 이해했을까? 자신조차 도무지 알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은 이 부분도 침묵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그것이 가능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스스로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황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고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믿었다. 투명한 모순과 불투명한 불안 속에서도 “몸서리치게 하는 공포와 치아가 맞부딪히는 전율”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 변화 받은 마음을 증거한 거룩한 산 제물의 이야기이다.

PS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under the Sun이 아닌, under the Son”이 되어야 한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