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운행(命之行) – 부득이(不得已)

죽음과 삶, 존재와 망함, 실패와 성공, 가난함과 부요,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난과 칭찬, 추위와 더위. 이것들은 세상일의 변화요 명의 운행(命之行)이다. 밤낮으로 눈앞에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앎으로는 그 원인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변하는 변화에 그대로 맡겨 둔 채 상관하지 않는다.<덕충부 15>

장자는 출생과 죽음을 포함한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든 상황을 가리켜 일(事)의 변화요 ‘명’(命)이라 한다. 명은 중국 고대로부터 이어오는 개념으로 상제(上帝)의 의지를 뜻하는 종교적 개념인 하늘의 명령(天命)을 포함한다.

즉, 하늘로부터 명을 부여받아 고유한 삶이 확보되는 것처럼 어떤 사물이 바로 그 사물이 되도록 선천적으로 주어진 속성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 삶은 명”(死生命也)이라 함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죽음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한 일들을 의미하고, 더구나 이러한 변화가 눈앞에서 항상 일어나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상(子桑)이 말했다. 나는 나를 이처럼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부모가 어찌 내가 가난하길 바라겠는가? 하늘은 공평하게 만물을 덮고, 땅도 사심 없이 위로하는데 하늘과 땅이 어찌 사사로이 내가 가난하게 하겠는가. 이렇게 한 이를 찾으려 하나 그렇지 못했다. 자연히 이처럼 극한 곳에 이르게 한 이는 명(命)일 뿐이다.<대종사 39>

자상은 도를 터득했음에도 불운한 가난을 명으로 겪고 있다. 누구나 힘든 상황이나 고난의 자리에 놓이게 되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고 부조리하게 보이고 까닭을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데,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는 명의 운행(命之行)은 단순한 인과관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원인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그 운행의 원인은 파악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화인 하나의 신비로 다가온다. 수많은 삶의 상호작용 속에서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인간의 앎으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 모든 때가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코헬렛과 달리 명이 운행하여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선악의 가치부여를 하지 않고 그 자체를 부득이함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 이해할 수 없는 ‘하벨’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1>

전도서의 ‘때’는 ‘명’과 같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어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 또한, 인간이 거부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명의 운행과는 다르게 때에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점이 차이가 난다.

또한, 하나님은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때가 결정되어 있거나 고정불변한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장자의 명의 운행과 같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때는 적절한 시기에 주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코헬렛은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먼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는 전제 아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기한과 때는 정해진 날 그리고 어떤 특별한 시점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장자와는 다른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시간의 틀 속에서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 개념 아래 코헬렛은 구체적인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

장자와 같이 코헬렛도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먼저 생과 사에 대한 것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은 출생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인생의 모습을 포괄하고 있다. 코헬렛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통해서 그사이에 포함되는 모든 삶의 활동들이 정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안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출생과 죽음을 좀 더 일반화시키면 생성과 소멸, 나아가 창조와 파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만물은 그 시작이 있는 것같이 그 끝이 있으며 이것은 정해진 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시작과 마지막도 정해진 질서를 따라 난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 자의적인 결정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코헬렛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음을 14쌍으로 이루어진 삶의 변곡점을 중심으로 28번의 때를 세세하게 말하며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시간적인 틀을 역사라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틀 속에서 친히 개입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이 코헬렛의 시간 인식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은, 시간의 변화에 대한 불투명성으로 인간은 그 한계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발생한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전도서 3:9).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주관된다면 그 안에서 어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는 철학적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코헬렛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대립하는 양극단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구성 요소들, 또는 그와 상반되는 상황들까지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따라 발생케 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동참하게 함으로 삶의 의미를 가지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사가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음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현장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본능을 심어주셨다고 코헬렛은 평가한다.

가끔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완전성이 더 분명해질수록 삶에 대한 강한 희열을 느끼기보다, 내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희박해짐을 느끼곤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를 너무 완벽하게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기도 한다.

더구나 코헬렛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역사의식을 주시고 때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부여하셨다.

또한, 그것을 탐구하기 위한 본능을 주셨지만 정작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이 하벨이라는 코헬렛의 외침으로 돌아간다.

하벨과 부득이의 사유 개념
장자의 ‘명의 운행’에 대한 ‘부득이’와 코헬렛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하벨’은 ‘어찌할 수 없음’ 또는, ‘이해할 수 없음’으로 주어진 삶에 순순히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의미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부득이나 하벨은 단지 현실에 대한 직시나 인식으로 궁극적인 지향점은 아니다.

장자는 <양생주>에서 부득이한 현실적 속박에 대해 ‘절대자(上帝)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인 ‘현해’(縣解)를 통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말하고, 코헬렛은 그의 마지막 결론인 사람의 본분으로‘하나님 경외’를 말한다. 코헬렛과 장자는 인간 존재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부득이함과 하벨을 인식함으로 대립과 마찰을 통해 참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무작정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절대자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나 하나님 경외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시기와 때를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전통적인 지혜 전승은 사람들이 각각의 경우에 맞는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따라서 적절한 행동과 말의 바른 때와 그릇된 때를 구별하는 것이 이상적인 지혜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에 맞는 알맞은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에 코헬렛과 장자는 인간이 한계적 존재이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파악한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그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

그 때문에 장자와 코헬렛에 드러난 현실 직시에 대한 자세는 세상을 초월(超越)하려는 인식보다는 세상에 대한 초연(超然)이라고 표현해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이나 종교는 대체로 현실 세계를 건너뛰어 어떤 유토피아로 떠나려는 초월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초연은 현실 세계 안에 여전히 머물면서 넘어섬이다. 이는 세상에 머물면서도 세상을 떠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예컨대, 철저히 현실적 토대에만 집중하여 영원에 대한 무엇도 상상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이데아라는 상상의 세계를 실제로 삼아 현실을 저버리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코헬렛과 장자의 사유법은 현실 세계의 이성적 원리들의 불합리를 부득이와 하벨로 수용함으로써 시작한다.

이러한 사유개념은 기존의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 구조를 영원이라는 무시간적 영역과 혹은 명의 운행을 통한 시간을 극대화함으로 모두 포용한다. 인간 존재가 아무리 이성과 의식만으로 살아내려 해도 결국은 감성과 무의식을 거부할 수 없음을 말한다.

코헬렛과 장자는 그러한 하벨과 부득이에 대한 인식이 먼저 요구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한한 상상력에 의한 초월일지라도 그 현실적 토대를 떠나지 않음은, 코헬렛과 장자의 독특한 감성적 사유방식의 특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한 장자와 코헬렛의 삶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부분은 다음 회에 연속 다루어 보려 한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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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