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몰랐다. 그러나 문득 깨었는데 틀림없는 장주인 것이다. 도대체 장주의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겉보기에는 반드시 구별(有分)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만물의 변화(物化)라고 한다<제물론 齊物論 32>.
위 인용은 호접지몽 우화이다. 우화(寓話)란 본의를 다른 사물에 비유하여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그러하기에 본뜻은 글 뒤에 숨어 보이지 않고 에피소드만 겉으로 드러난다. 장자가 이 방식을 많이 쓴 이유는 논리적인 말로 그의 사상을 규정 또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에피소드 뒤에 숨겨놓고 독자가 스스로 찾도록 열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접몽’(胡蝶夢)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치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허무주의적 뉘앙스를 품고 있지만, 장자는 인생을 한바탕 꿈처럼 헛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마치 전도서의 모토가 해 아래 인생의 삶이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하지만 헛되다는 그것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코헬렛의 고뇌와 같이 장자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전생(全生)을 중요시하였다.
먼저 호접지몽의 우화는 깨달음을 얻은 노인인 장자가 아직 그 이전의 깨달음을 얻기 전 자신이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꿈’과 ‘깸’을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나비’와 ‘장주’는 ‘거짓 나’(허상)와 ‘참된 나’(실체)라는 이중구조로 이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 우화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장자가 꿈에 나비 꿈을 꾸고, 또 깨어나 누가 누구의 꿈을 꾸는지 모르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둘째는 장주와 나비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는 유분(有分)의 구절, 셋째는 이것을 만물의 변화라고 한다는 물화(物化)의 구절 등이다.
먼저 호접몽(胡蝶夢) 부분은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 것과 또한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지 못한 것으로,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고 허상인 나비의 정체성과 혼동하는, 곧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유분(有分)은 문자적으로 개념의 구별 또는 구분이 있다는 것으로 ‘구분’을 긍정하려는 의도로 보았다. 이렇게 해석한 근거는 장자는 제물론에서 도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같다는 만물제동을 중심 주제로 하지만, 제물(齊物)은 물질세계의 범주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즉 사물의 모든 상대적인 가치와 차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장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정신적 자유는 물질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으로 제물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무엇보다 장자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을 다르게 보았다. 이러한 구분의 대상으로 ‘꿈’과 ‘깸’의 원관념이 ‘어리석음’과 ‘깨달음’이라는 점이다. 더불어서 장자와 나비도 그 원관념이 ‘참된 자아’와 ‘거짓 자아’로 이 둘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물화(物化)는 나비와 구분되는 참된 자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어리석은 상태를 의미한다(전통적인 견해는 물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많은 연구가 있다). 도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같게 보이지만 물화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물화란 물질에 의해 참 자아가 변화된 상태로 사물을 지각함으로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호접몽의 상태와 통하는 면이 있다. 즉 물질의 세계에 참된 자기를 뺏긴 상태이다.
사람의 육체는 비록 물질이지만 전체적으로서의 인간의 삶이 물질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DELUSION(망상)
꿈(夢) 이나 환상(幻想)이란 계속해서 지속되지 않고, 잠깐 일시적인 시간에만 나타나는 혹은 허락된 현상으로 반드시 중간에 깨어나게 되어있다.
하지만 성경은 때때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며 환상과 꿈으로 설명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꿈과 환상이 현실(現實)이 되고 살고 있는 역사(歷史)는 꿈과 환상(허상-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음)으로 전환된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5~17)
우리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의 척도는 만져지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들을 통한 지각(知覺)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각에 따라 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한다. 그런데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이 본 것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걸 본 것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은 것으로 그게 환청이고 환시여도 그들에겐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엄연한 현실로 실재이고 그들의 지각인 셈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거기에 동의해 주지 않고, 다른 다수의 이들이 이들을 미쳤다 혹은 망상이라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실재하는 실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이라는 건 객관적인 진리이기보다는 상대적이며 개별적인 것으로 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한 셈이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이나 사건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게 된다. 이는 모든 인간은 그의 지각의 상태와 정도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장자는 호접지몽에서 ‘물화’(物化)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각은 어떤 존재에게 혹은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가에 의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정작 보지 않아도 될 것을 현실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성도는 보지 않아야 할 것에서 눈을 돌려서 아무도 볼 수 없는 진짜 현실을 볼 수 있는 존재로 구별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상과는 전혀 다른 분류로 구분되어 지는 셈이다.
그러하기에 자연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 대한 탐구, 심지어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까지도 경험한 후, 깨달음을 얻은 코헬렛이 지각하는 현실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1)
묵시(默示)와 역사(歷史)의 세계
성경의 언어인 묵시(아포칼립스 Apocalypsis)는 아직 정확한 개념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문자적으로 ‘벗기다’ 또는 ‘드러내다’를 중심으로 ‘뜻을 나타내어 보임’이라는 뜻으로 통상 사용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알리시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 곧 ‘영원 자체의 상태’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역사란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연속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 따라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묵시 세계에 대한 자기 뜻을 펼치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의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인 묵시의 세계가 검증되고 작용하는 현장이다. 한마디로 묵시 세계의 실체가 역사 세계에 우리의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나에게 지각되는 현재의 실존 감각, 즉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스스로의 ‘자각’ 보다 더 강한 진리가 없다. 그러기에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사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 등에 대한 감정이나 느낌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만이 진리이며 실체인 줄 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 기록해 놓았다.
이 말은 성도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 보이지 않는 묵시의 세계의 증거와 실상으로 믿음이 있음을 말한다. 즉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들은 현재 상황이나 사건, 느낌이나 감정으로 자신의 현실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일희일비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약속, 하나님 나라를 현실과 진리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고 있는 이 역사 속 역할은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묵시의 시간)에 비해 백 년도 지속될 수 없는 한시적인 꿈과 같은 것이다. 즉 성도의 역할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반드시 끝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생이라는 역사 세계에서 성도라는 옷을 입고 맡고 있는 그 역할은 때가 되면 끝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의 느낌이나 감동, 즉 오늘 아무리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라 할지라도, 혹은 오늘 우리가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내일 우리의 시간이 어떠한 감정으로 채워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성도가 맡은 역할이나 느낌은 묵시의 세계에 대하여 한시적이며 유동적이기에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과 역사는 어떤 면에서 묵시의 세계 속에 이미 완료되어있는 ‘내’가 있다(에베소서 1:4). 그렇다면 내가 사는 현재의 이 인생은 묵시 속의 ‘내’가 꾸는 꿈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묵시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 여기 인생이라는 역사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 분명 같은 존재이지만 둘이 서로 다른 존재로 구별되어 현실에 공존하여 사는 삶으로 나를 자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현재의 역사라는 나그네 인생길인 ‘꿈’이 깨면 사라지고 영원한 실재의 하나님 나라, 묵시의 세계에서 깨어나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기에 장자의 호접지몽이 남다르게 읽히는 이유이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상을 넘나들면서 고도로 설계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의지가 충돌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Morpheus)가 이런 말을 던진다.
“너무도 현실같이 느껴지는 꿈을 꿔본 적이 있나, 네오?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찌하겠나? 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지?”
“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