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스스로 존재’ 하시는 분

신학에서 하나님을 절대 존재자로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이다. 동시에 ‘절대’라는 용어는 신학보다는 철학에서 더 특징적인 단어이다.

형이상학에서 ‘절대자’라는 용어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를 지시하는 것으로 성서의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로 말한다. 철학의 절대자가 신학의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절대자에 관하여 갖는 개념에 달려 있다.

절대자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제 일 원인으로 혹은, 모든 실재의 궁극적인 근거로 혹은, 하나의 자존적인 존재로 규정될 때 절대자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장자의 도와 성서의 하나님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자연(自然),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 YHWH
자연(自然)은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으로 ‘스스로(저절로) 그러한 것’ 즉, 산이나 물, 혹은 ‘스스로 그러한 원리’이다.

지난 글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장자는 천지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을 따지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이미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의 사고를 출발한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통하여 깨달은 자연(도 道)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그 속에서 변화의 모든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순환의 연속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3:14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속성과 장자의 철학이 일정 부분 공감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I Am who/that I Am)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는 ‘나는 존재하고 있는 자다’ 또는, ‘스스로 있는 존재’라는 명사의 의미로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존재나 상태로, 자연을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한 단어로 재해석할 수 있다.

여호와를 의미하는 테트라그라마톤(YHWH)은 이름으로 보자면 명사이다. 하지만 그것은 히브리어 동사 ‘하야’의 3인칭 미완료로서 동사이다. ‘하야’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살아있는 존재’를 나타내고, 그리고 그 이름에 드러나는 형식은 ‘내가 원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 또는 ‘내가 이루고자 계획한 것을 내가 이룬다’란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명사와 동사 사이를 횡단한다. 그러면서도 이 네 글자는 너무나 거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혀 지지 않았고 소리가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의 불가해(不可解)성 – 흔적으로의 도(道)
노자는 <도덕경> 첫 문장을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로 시작한다.

이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항구불변) 도가 아니며, 개념을 설정하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인, 무명은 하늘과 땅의 기원(시작)이요, 이성으로 파악되는 현상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인, 유명은 만물을 기르는 양육자”로 설명된다.

또한 “도은무명”(道隱無名), 즉 “도는 감추어져 이름이 없다”라는 말로 절대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것 같아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로 노자는 그것이 너무나 미묘하여 언어로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억지로 도라 한다고 했다.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제2권 신론은 노자와 같이“하나님의 불가해성”으로 시작한다. 바빙크는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영원하고 무한”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는“무한자와 유한자, 영원과 순간, 존재와 생성, 만유(萬有)와 허무(虛無) 사이의 격차”이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무한히 초월한 존재”로 우리의 이해, 상상, 언어를 무한히 초월하신 분으로 불가해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존재의 원리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이처럼 노자와 바빙크는 도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 신비함을 아무리 표현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혹은 존재로 정의한다. 그 때문에 노자는 도라는 글자는 절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이름을 붙인 것으로, 단지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크다”라고 하였고, 기독교는 위대한 하나님으로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완전히 알 수 있게 지칭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속성도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알려 줄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은 유한한 인간에게 맞추어 주신 신인동형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근본(根本)과 절대 존재(비공유적 속성)의 하나님
도(道)와 하나님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말(言)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 함축된 의미는 유소감(劉笑敢)의 <장자 철학>과 바빙크의 신론에서 각각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유소감은 우주적 근본으로서의 도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 인식으로서의 도로 바빙크는 인간과 공유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신적 특성들인 비공유적 속성(절대 존재의 하나님)과 인간과 공유될 수 있는 특성인 공유적 속성(인격적인 영으로 하나님)으로 구별한다.

장자에게 있어서 도는 근원적(根源的)인 실재(實在)로 인식된다. 이것은 도를 우주의 근본으로 파악하는 장자의 기본 사상이다. 또한, 스스로 근본이 되고 뿌리가 된다 함은 도가 파생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늘을 생기게 하고 땅을 생기게 한다고 함은 도가 천지 만물의 기원이라는 뜻이다.

즉 도는 스스로 근본이 되고 또 천지 만물의 근본이다. 또한 도는 모든 만물은 도에서 생성되었으며 도는 모든 만물(萬物)에 존재하는 우주(宇宙)의 본체(本體)라는 말이다.

이에 바빙크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 출애굽기 3:14의 “스스로 있는 자”를 근거로 가장 먼저 하나님의‘자 존성’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빙크는 자존성의 중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존재하신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성과 독립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자존성은 다른 모든 속성의 존재 방식을 말해주는 속성으로써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 주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고유한 존재, 고유한 본성, 실체, 본질을 가지고 자율적인 존재와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 자존성을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묘사할 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존재자로 알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완전을 통해 곧바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고유한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자존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한성 그리고 유일성으로 연결된다.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자존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며 시간의 척도에 따라 측정되거나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분이시며, “그 영원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존재의 충만함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공간과 장소를 무한히 초월하는 분으로서 그것들에 의해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는 분이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으로 정의 되어진다.

최고 인식(認識)으로서의 도(道)와 인격적인 영(공유적 속성)으로서의 하나님
“무릇 도(道)는 유정(有情)하고 유신(有信)하며 무위(無爲)하고 무형(無形)하다.”고 하였다. 무위(無爲)라는 것은 목적이 없 고, 작위(作爲)함이 없다는 뜻이다. 즉 무목적성(無目的性)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도(道)가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며 만물을 결정하는 것은 모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과정인데 이는 무의식(無意識)적이고 무목적(無目的)적이고 무인격(無人格)적인 것이다. 이점은 무위자연의 이론으로 장자 철학을 이해하는 기본 관점이다.

장자의 도가 성서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언급될 때, 그 어느 곳 어느 경우에서도 인격성이 배제된 추상적 혹은 관념적 성격의 본질로서 묘사되거나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말할 때, 그 본질 곧 신적인 본질을 추상적으로나 혹은 관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장자의 도와 같이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에 관해 언급될 때,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 곧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살아 계신 인격적 존재로 그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뜻이 그분의 현존(現存)과 함께 묘사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모든 신적 속성들이 드러나 알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영원과 시간 사이에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천지만물의 세상을 사유함으로 관찰하여 얻을 수 있는 구별된 성경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서 동서고금 철학에 나타난 신 지식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이러한 신 지식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데 하나님은 천지만물에 나타난 자신의 작품들과 역사를 통해 인간을 찾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어떤 면에서 실증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있는 참되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말씀(특별 계시) 가운데 온 세상에서 자신을 어떻게, 그리고 자신에 대해 무엇을 계시했는지 묘사하지 않았더라면 천지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철학이나 사상을 취급함에 있어서 성경 안에 있는 특별계시와 성령의 조명을 제거하고 어떤 초월자를 논의하고 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로마서 1:20~23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