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만나게 된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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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가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교일까? 불교일까?

후손이 귀해 할아버지께서 두 형제 중 장남이심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대신하여 우리 집에 양자로 오셨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북두칠성을 지극정성으로 섬기시어 아들 넷을 낳았다고 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외 바위, 둘째 아들의 이름을 또 바위, 셋째 아들의 이름을 삼 바위라고 했으며 네 번째 아들을 돌이라고 했겠는가?

삼 바위인 내 나이 15살 때, 동네에 교회가 생겼다. 목수가 살던 들 가운데의 집에 교회가 생긴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11살짜리 고종사촌 여동생이 교회에 가보자고 졸랐다. 교회에 나갔더니 이전에 먼저 나온 친구들이 너무나 어질게 보였다.

40여 명이 앉으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문 앞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비좁은 예배당이었다.

전도사가 담임교역자였으며 전 교인이 가진 성경은 모두가 4-5권정도 밖에는 없었다. 찬송가는 괘도에 붓글씨로 써서 사용을 했으며 전도사가 먼저 선창을 하면 따라서 불렀지만 은혜 충만하였다.

교회에서 처음 배운 노래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라는 노래로써 잊을 수가 없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시편 23장의 내용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첫 번째로 기독교인이 된 나는 나이가 만 16세가 되지를 못해서 세례는 받지 못하고 학습을 받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이었으므로 중고등부에 소속은 되었지만 별도의 성경공부는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중고등부를 합하여 학생이 한 사람 밖에 없었으며 주일학교 교사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가 6년 과정 이었으며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 수복 이후부터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구에서 공부를 하던 작은 형이 방학을 하여 집에 왔을 때 부탁을 했다.

“대구에는 성경을 파는 책방이 따로 있다면서?”
“나 성경 한 권 있으면 참 좋겠는데…”라고, 은근히 졸랐다.

그런데 그 다음 방학 때 형이 대구에서 구입한 성경책을 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좋았다. 찬송은 없어도 괘도를 그려놓고 선창을 하는 전도사를 따라서 하면 배울 수가 있었지만 성경은 자기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독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가출 보따리를 싸면서 성경은 생명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꼭 가지고 갈 책으로 구분을 했었다. 대구의 커피숍에서 담배 팔이를 하면서 등 너머로 배운 커피와 차를 타는 기술을 배울 수가 있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소작인에게 땅을 분배해 주고 난 다음, 가족이 가난하게 되었단다. 세 살 위인 작은 형과 나의 학비를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 혼자서 부담하게 된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결국 휴학을 하기로 결정 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짓는 집이라 피살이, 김매기, 콩밭 매기, 논에 물 대기 등,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단오 때부터 약 2주 동안 농한기가 되어 오후가 되면 동네 아이들 6-7명이 소를 먹이려고 거의 매일 산골에 모였다.

소 고삐는 소의 배에 메달아 놓으면 소들은 소들대로 풀을 뜯었으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여 노닥거리며 놀았다.

이때에 부르던 찬송가는 교회에서 배운 “예수 사랑하심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인애하신 구세주여”등을 부르며 예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학비가 없어 더 이상 공부를 못하게 되어 가출을 한 다음에도 오직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아주 없을 때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시간만 되면 교회의 중고등부에 다녔었다.

가출을 하고 난 다음, 한번은 포항 행 새벽열차를 타게 되었는데 내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다. 고개를 들고 목사님을 바라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사님은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부잣집 아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나의 인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그토록 외치던 목사님이 아니시든가? 편애하는 목사님에 대해 가슴이 방망이 질 치고 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불에 처넣을까? 찢어 버릴까? 생각하다가 내가 잘 아는 가정부의 딸아이가 교회에 잘 다닌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그 아이를 찾아가 “너 성경 필요하지?” 그리고 성경을 그 아이에게 주고 난 다음 나는 교회에 발을 완전히 끊고 말았다.

이른 아침 6시부터 시작되는 신문배달이 10시경까지 계속되었으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 보다 세 살이 많은 누나를 만나게 되어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흉허물없이 상의 할 수 있게 된 누나를 알게 되어 너무나 좋았었다.

2년 이상의 가출이 나에게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것은 누나의 돌봄이 있었으며 나 또한 오누이로 믿고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가출 2년이 지났을 때 그 누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 집까지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내가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누나는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게 되었으며 매부도 친 처남처럼 인정해 줌으로 한 집안 식구같이 지내게 되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었다.

천주교를 믿는 누나의 집이었지만 항상 사랑이 넘쳤다. 경주에 있을 때는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은 나를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형부와 함께 먹으며 잠도 한방에서 같이 잘 수 있게 했다. 딸은 친 조카처럼 여겼다.

내가 결혼하여 해운공사의 견습 선원으로 응시 할 때도 역시 누나의 집에서 머물렀다.

2년 이상의 대기 끝에 발령을 받았으며 부산으로 이사를 하고 난 다음에도 셋집이지만 이웃하여 살게 되었다. 내가 출항을 해도 집사람은 외롭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뒤에 휴가로 한국에 나와 영등포에 있는 누나집을 찾았다. 누나는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에도 가 보았다. 묘비명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뉴질랜드로 이민 올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