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출생 여성 작가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이 1937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발표했다. 작가는 17년간의 아프리카 케냐 이민생활에서 경험했던 모험들과 깨달음을 담아냈다. 이 소설은 1985년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와 원작 소설에는 차이점이 있다. 영화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주제라면 소설에서는 단연 아프리카의 ‘대자연’이 주제가 된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다. ‘아프리카’ 하면 왠지 미지의 나라 같은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는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의 문화는 뭐랄까 자주 접하지 않아서 그런지 낯설다 못해 신비로운 인상마저 준다. 그만큼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적잖이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받았다. 동시에 아프리카를 조금 알아가는 기회도 되었다.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작가는 케냐에서 커피농장을 경영했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사업을 꾸려 나갔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간사회의 갈등과 충돌을 접했고 문제해결을 경험하면서 성숙해져 갔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개념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자신의 ‘정의관’과 맞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소설 내용 중에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정의에 대한 관점’이 달랐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불행한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바로 보상이었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그 행위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런 건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계기와 과정, 그것을 일으킨 당사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재판 법정에서는 과정과 절차를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서 관점이 달랐다. 이들은 똑같은 처벌을 내린다.
“손해가 발생하면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 그들의 죄의 경중을 따지는 데는 시간과 정력을 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일에 매달리다 도를 넘어서게 될까 봐 두려워하거나 그런 건 자신이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보상 방법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끝없이 생각한다.”
‘다름’을 받아들이기
유럽인이었던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상황을 접했다. 커피농장의 주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소작농들을 상대했다. 이들은 소말리아족, 마사이족, 키크유족 등 다양한 족속들 출신이었다. 이들은 저마다의 생각들이 있었고 요구상황도 다 달랐다. 또한 아프리카 식민지로 이주해온 유럽의 이주민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았다. 이들의 종교는 다양했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주류였다.
이 작품에서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첫 관문은 문화충격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다름’을 받아들였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구나!’ 생각하다 보니 자신의 인생이 풍요로워졌고 끝까지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큰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래서 1954년과 1957년 두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 믿는 이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남다른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와 생각이 다르면 틀린 것일까? 아니다. 다름을 받아들여야 인생이 풍요로울 수 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지나가는 행인들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을 보면 한 번 더 뒤돌아본다. 왜냐하면 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것이 믿는 이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의 다른 점이다. 이 다름이 우리에게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이 신앙인인지 아닌지 구별이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이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남다름이어야 한다. 이전에 어느 교회의 목회자 사무실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 표구 하나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목회자의 자존심은 거룩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짧은 글이 나의 인상에 각인되었다. 그 글의 내용처럼 사는 것이 믿는 이들의 남다름이지 않을까.
인생의 공허함으로 힘들어하던 니고데모
인생이란 참 공허하다.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인생의 공허함으로 고민하고 있던 니고데모의 심중을 간파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처방을 내린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우주보다 광대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라고 권면하신다. 그래야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인생의 공허함이 사라지고 비로소 인생이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믿는 사람은 뭐가 다른가? 복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마침내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부자였다.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는 명예와 권력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 할 만큼 지식도 갖추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갖출 것은 다 갖춘 것 같았다.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점점 인생의 허전함을 느꼈다. 허무한 삶을 살았던 그가 인생의 의미를 찾고 고민하다가 결국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니고데모는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예수님이 거듭남의 말씀을 주셨을 때는 자기만 생각하던 이기적인 자였다(요 3장).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전하며 전도하는 자가 되었다(요 7장). 나중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목숨을 걸고 자신이 헌신하는 주님의 제자인 것을 떳떳하게 드러내었다(요 19장). 이것이 니고데모에게 일어난 복음의 역사이다.
인간의 욕심이란 태평양처럼 넓고 끝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욕심은 채우고 또 채워도 그 무엇으로도 다 채울 길이 없다.
결국 복음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한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려왔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니고데모가 경험했던 인생의 공허함과 허전함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평양보다 더 넓고 우주보다 광대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들어오셔야만 비로소 인간의 그 공허함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남다름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