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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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께 제 마음을 바치도록 그를 제게 주옵소서.”

알리사가 남긴 일기 속에는 더없이 제롬을 갈구하지만 종교윤리의 두터운 벽에 갇혀있는 그녀의 내면적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둘은 끝내 결합되지 못하고 알리사의 죽음이란 비극적 결말로 마침표를 찍는다.

“좁은 문”(Strait is the Gate)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Andre Gide)가 190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플롯의 설정이 다분히 자전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그의 아내는 소설 여주인공 알리사처럼 두 살 연상의 외사촌 누이였다고 한다(당시 유럽에선 외사촌지간의 결혼이 합법적이었다).

소설의 발단은 제롬이 열네 살 때 벌어진다. 외사촌 누이 알리사는 열여섯 살 때다. 방학 때마다 외삼촌댁에 들렀던 제롬이 하루는 외숙모가 자기 방에서 젊은 장교와 희롱하는 걸 엿보게 된다.

알리사의 방으로 가보니 그녀는 침대 맡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엄마의 불륜으로 인해 눈물로 흠뻑 젖은 알리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제롬은 사랑과 연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 삶의 목적은 이제 공포와 악의 삶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것뿐이다.”

제롬은 자신의 생을 그녀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사랑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둘의 관계는 세속과 거룩이란 종교적 이슈에 휩쓸려 들어간다.

교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를 주제로 한 목사의 설교를 제롬과 알리사가 듣게 되면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태복음 7:13)

목사의 설교엔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청교도적 금욕주의가 깔려있었다. 어린 두 남녀가 넘어서기엔 너무 높은 종교적 장벽이었다.

제롬은 시간이 갈수록 우유부단해지고 전인격적인 사랑보단 거룩이 훼손되지 않는 정신적 사랑에 집착해갔다.

알리사는 내면적으로 더욱 치열한 갈등을 겪었다. 그녀는 제롬을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었다.

“제롬! 곁에 있으면 마음이 찢어지고 멀어지면 죽을 것만 같은 애달픈 나의 벗!”

알리사는 한때 여동생 쥘리에트가 제롬을 짝사랑한단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일부러 제롬을 멀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쥘리에트가 다른 구혼자와 결혼한 이후에도 알리사는 제롬에게 마음을 한껏 열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의 불륜 탓에 알리사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환멸과 두려움을 느꼈을 수 있다.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인간의 감정보단 절대적인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알리사도 행복을 원했다. 그러나 알리사는 선택해야 했다.“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좁은 길이옵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옵니다.”

그녀는 결국 고행과 금욕의 길을 선택했다.

“아냐, 제롬. 이젠 늦었어….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던 거야.”

알리사는 제롬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물건을 없애버렸고, 금욕을 향한 혹독한 자기 절제의 싸움은 마침내 알리사를 병들게 하여 그녀는 요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제롬을 추억하며 결혼 않고 홀로 살아가는 알리사와 그녀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대화가 소설의 결말이다.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다고 믿어?”
“그래, 쥘리에트.”
“삶의 거센 바람이 나날이 불어 닥쳐도 그 사랑의 불은 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그 희망없는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서 매일매일 숨쉬며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는 거야?”
(중략)
“자,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쥘리에트의 말은 제롬식 사랑의 허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관념 속의 사랑. 제롬은 알리사를 품지도 놓지도 못한 채 그저 맴돌고만 있다.

이 비극의 뿌리엔 율법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것(요한복음 8:32)인데, 오히려 성도의 삶을 옥죄는 율법적 멍에.

우리 삶에서 행복과 기쁨을 앗아가고 대신 고통과 슬픔을 강요하는 일그러진 금욕주의.

소설을 읽는 내내 이로 인해 사랑을 잃고만 두 주인공의 비련으로 마음이 아렸다. 이는 단지 100여년전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기형도 시인이 그의 시“빈집” 에서 노래한 가엾은 사랑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좁은 문”은 당시 유럽사회의 청교도적 금욕주의가 끼친 폐해를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앙드레 지드가 공식적으로 어떤 비평을 내놓은 건 아니다.

그는 “좁은 문”의 서문에서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할 계제가 아니다. 내 역할은 독자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소설예배의 독자는 통찰한다. 이 소설의 좁은 문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그 ‘좁은 문’의 본뜻과는 궤를 달리한다.

마태복음 7장 13절의 좁은 문은 그 다음 14절에서 계속 설명하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일컫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의 문은 다름아닌 예수의 문이다. 넓고 넓은 은혜의 문이지만“오직 예수”인 까닭에 좁다. 그러나 좁은 문은 단지 입구만 좁을 뿐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릴 맞이한다.

알리사의 생각과는 달리, 금욕이든 고행이든 우리의 공로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 절망이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 되고자 사랑과 행복을 끊고 불행과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은 한낱 종교적 고행일 뿐이다.

책을 덮으며 소설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영적 아쉬움을 달래고자 질문 하나를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만약 제롬과 알리사가 성경의 ‘좁은 문’ 에서 율법이 아닌 복음을 만났다면 둘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부디 이 책을 읽는 크리스천 독자들이 그 다음 사랑이야기를 삶으로 써나가는 후속편의 주인공들이 되어보시길 소망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