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고 뻐꾸기 우는 고향마을

누구나 고향산천에 대한 추억은 아름다울 것이다. 나의 고향은 경북 상주의 한쪽 끝에 붙어 있는 화동면이며, 충북 보은군과 경계를 이룬 곳이다. 50여 가구에 불과한 관제 동네였지만 화동면에서는 큰 동네중의 하나이다.

동네 뒤에는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으며 동네 앞에는 봇도랑 가득히 여름철에는 봇물이 항상 흐르고 있었다. 동네 옆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었으며, 벼농사를 짓는 논 때기가 손바닥처럼 펼쳐져 있었다.

금강 상류의 개울 건너에는 경사가 심한 앞산이 있었으며 동내 바로 앞에는 군청 소재지인 상주로 통하는 신작로가 있었다. 신작로를 조금만 따라가면 신의 티라고 하는 꼬부랑길이 시작되며 고갯길 아래로 내려가면 장자벌 마을이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면 내서면이다.

나는 고향마을에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방긋방긋 웃기 시작한 남동생이 2, 3일 동안 앓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어머니와 함께 다녀온 동생이 죽은 것이다. 소리를 죽이고 흐느끼는 어머니와 고모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며칠 뒤에는 아버지가 고열과 구토로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또 며칠 후에는 큰형이 고열의 질병으로 눕게 되어 정신없이 앓고 있었다.

그 당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사촌형 세 분과 사촌형수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촌가족 4명과 우리가족 5명이 한 식구가 되어 모두가 9명이었다.

어린 동생이 죽고, 아버지와 큰형을 병석에 눕게 한 것은 염병이라고 하는 장티푸스였다. 예방주사나, 치료약이 없던 때라 장티푸스에 걸리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했던 시대였다.

특히 우리 집은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졌으며 마당에는 풀이 수북하게 자랐었다.

오직 고모만이 드나들며 아버지와 상의를 하셨다. 주로 겨울철에 천연두나 염병이 유행을 했기 때문에 겨울철이 지나가면 동내의 식구가 많이 줄어들던 그런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고모의 극진한 간호와 민간요법으로(흰 개똥을 달여 마시고 땀을 내는 것)고비를 넘기고 회복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버지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그 동안 정신력으로 버티던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었다.

3일을 정신없이 앓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장례식은 지게로 관을 지고 나가는 것만 보았을 뿐, 그 이상은 알지를 못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때에 나는 7살이었으며 사촌형은 9살, 작은형은 10살, 중간 사촌형은 12살, 큰형은 17살이었다.

제일 큰 사촌형은 19살이었으며 결혼을 하여 사촌형수도 모두 한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었으며 17세 미만의 남자만 5명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설득(어린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으로 아버지의 재혼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새 어머니는 17세에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신 것이다. 새 어머니의 돌봄은 한창 성장기에 접어든 네 명의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새 어머니는 한창 2차 세계대전 중에 방직공장 직공이나, 일본종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외할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43세 된 아버지와 재혼을 하게 되었으며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온 어머니를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이 포근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재혼을 하신지 3개월 만에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학교에 갔다가 속이 이상하여 체육시간에 혼자 쉬었지만 속이 가라앉지를 않아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장티푸스로 쓰러져 석 달 동안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파리들이 얼굴을 덮고 있었지만 고개를 흔들 힘이 없어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일어설 힘이 없기 때문에 고함치며 울부짖는 울음소리도 대문 밖에서는 들리지를 않아 혼자서 발버둥 치며 몇 시간을 울었나 보다.

길 하나 건너면 앞밭이라고 부르는 밭에서 새 어머니는 일을 하셨나 보다. 몇 시간 동안을 병마에 시달려 울었지만 텅텅 비어있는 적막한 집일 뿐 어느 누구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번은 열이 40도를 넘어서자 나 자신은 천정에 올라가 있는데 방바닥에 누어있는 나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내 동생도 떠나고 어머니도 떠나신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세 살 위인 형이 논에서 잡은 예쁜 벌레를 병에 담아 왔다. 살아 움직이는 벌레를 병에 담아 왔을 때 얼마나 신기했든지 잠만 깨면 들여다보았다. 맑은 물속에서 움직이는 벌레를 보며 생동감이 넘쳐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처럼 한걸음 한걸음을 형의 손을 잡고 배우며 다리에 힘을 올렸다. 머리털도 거의 절반은 빠졌나 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으며, 중학교 1학년 때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6.25전쟁을 겪으며 낙동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라 대구까지 90km 지점인 장천면(설골)에서 한 달 정도를 지내다가 그 이상 내려 갈 수가 없어 다시 정든 고향인 상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피난을 떠났을 때는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야 순번이 되어 조각배로 낙동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가족들을 걱정하시던 아버지께서 당시 17살 된 아들도 몰라보시고 “형씨 말씀 좀 물어 봅시다.”라고 하셨던 말씀에 “저 라요.”라고 대답한 형님으로 인해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설골은 우리 집 일가들이 모여서 사는 아주 작은 동내였다. 뒷산에는 국군의 포병들이 대포를 장치하고 있었으며 나는 송아지를 낳다가 잘못되어 사산을 하게 된 것을 잡는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십여 명의 군인들이 계곡 사이로 나 왔다.

그런데 맨 앞에 내려오던 군인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순식간에 물이 흐르는 도랑물에 의지하여 국군의 포병들과 인민군들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되어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가족 모두는 재빨리 동네의 한쪽 옆에 있는 물이 없는 시궁창에 들어가 코를 막고 보리 짚을 깔고 몇 시간 동안을 견디었다.

오후 늦게 시궁창에서 나왔을 때 집이 세 채가 불탔으며 군인들은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인민군의 천지가 된 것이다. 대구로 가는 길은 가로막고 낙동강을 다시 건너가란다.

어머니는 동생 난이를 낳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18세 된 고종사촌 누나가 주로 업고 갔지만 어머니도 안고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