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묻는다. 지구별로 온 뒤 사막에서 만난 여우가“난 너와 놀 수 없어. 길들여지지 않았거든.”하고 말하자 어린 왕자가 그 뜻을 물어본 것이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답하는‘길들여짐’과‘관계’는 이 작품의 주제에 해당한다.

“그건…‘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내게 넌 수많은 다른 아이와 다를 게 없어.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돼. 넌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이 되는 거고, 난 네게 하나뿐인 여우가 되는 거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의‘어린 왕자’는 1인칭으로 쓰여졌다. 나레이터인‘나’는 아프리카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다.


‘나’는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지구를 떠나 자기 별로 돌아간 후 그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

어린 왕자가 살던 곳은 고작 집 한 채 크기만한 1인 별이라고 했다. 거긴 밥을 먹을 때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활화산 두 개와 휴화산 한 개가 있단다. 별이 얼마나 작은지, 해가 뜨는 광경을 보고 그 즉시 몇 발자국만 옮기면 반대편에서 해지는 장면도 볼 수 있다.

그 별에 어느 날 장미 씨앗이 하나 날아들었단다. 장미는 첨부터 교만했다.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자기가 해님과 같은 시간에 태어났다며 허세를 부렸다. 장미는 꽃봉오리를 피우면서부터 허영심이 더해졌다. 밤에 춥다며 유리덮개를 덮어달라고 하질 않나, 바람이 싫다고 바람막이를 해달라고도 했다.

어린 왕자는 이런 장미의 심술과 투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장미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별을 떠난 어린 왕자는 6개의 1인별을 거쳐 일곱 번째로 지구에 도착했다.

그 후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여우를 만난다. 그리고 이 글 첫머리에 소개된 대화를 통해 어린 왕자는‘길들여짐’의 관계에 대해 배운다. 그는 곧장 떠나온 장미꽃을 떠올렸다. 장미꽃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관점이 바뀌는 순간이다.

실은 얼마 전, 어린 왕자는 사막을 건너 장미꽃이 만발한 어느 정원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곳엔 자기 별의 장미와 똑같은 꽃들이 무려 5천송이나 피어있었다. 어린 왕자는 그 꽃밭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곤 거기 장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겐 나의 꽃 하나가 너희 모두보다 소중 해. 내가 물을 준 것은 그 꽃이기 때문이야…..불평을 들어주고 허풍을 들어주고 때때로 침묵까지 들어준 것은 그 꽃이기 때문이야. 나의 장미이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의 이 깨우침은 우리에게 김춘수 시인의“꽃”을 연상시켜준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삶은 하늘의 수많은 별들 가운데 섞여있어도 그저 1인 별일 뿐이다.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을 떠나 차례로 방문했던 6개의 별들 역시 1인별이었다.

아무도 이롭게 하지 못하는 나 홀로 임금님, 스스로를 찬미하기에 급급한 허영꾼,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덧없는 술주정뱅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소유하는 사업가, 속절없이 바쁘기 만한 가로등지기, 인생을 방관하며 제3자로만 살아가는 지리학자.

그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구에 수십억의 인구가 있지만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 세계엔 단지 수십 억 개의 1인별이 존재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와 작별하며 한가지 비밀을 알려준다.“어떤 것을 잘 보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사실 이 ‘비밀’은 나레이터인 ‘나’가 어릴 적 이미 경험한 것이기도 했다.

6살때였다. ‘나’는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커다란 보아 뱀이 코끼리를 통 채로 꿀꺽 삼킨 후 꼼짝 않고 잠을 자는 모습이었다.

그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무섭지 않냐고 묻자, 어른들은 “모자가 왜 무섭냐?”고 반문했다. 그림의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중절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그림을 보자 “보아 뱀에게 먹힌 코끼리는 싫어!”하며 도리질을 치는 것이었다.

이웃의 진짜 모습은 마음으로만 보인다. 어린 왕자의 장미라고 해서 겉모습만으론 장미가든의 5천송이 장미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어린 왕자의 마음에 새겨진 장미꽃과의 사연은 둘만의 것이다. 그녀의 불평, 허풍, 침묵마저 둘에겐 특별한 관계를 엮는 씨줄과 날줄이 된다.

‘어린 왕자’가 기독교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창(窓)으로 들여다보면 그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교회에 대한 교훈이 그것이다. 교회는 공동체다. 그러나 그 안에 숱한 1인별이 존재한다.

임금님, 허영꾼, 술주정뱅이, 사업가, 속절없이 바쁜 가로등지기, 지리학자 같은 방관자. 그뿐인가? 장미꽃 같은 이웃도 있다. 교만, 허영, 심술, 투정으로 가득 찬…

그러나 교회엔 소망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라고 말했듯이. 우리에게 우물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마태복음 11:29) 라고 말씀하실 때 그 온유의 바탕이 다름아닌 길들여짐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가복음 12:31)고 예수님이 명령하실 때 우린 각자 1인별을 떠나 사랑의 공동체를 살아가도록 요구된다.

누군가를 길들이면 책임도 져야 한다. 작품 말미에 어린 왕자는 자신만의 장미꽃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자신이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다. 독을 품은 노란 뱀에게 자길 물어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그게 자기 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므로.

예수님은 몸소 그 길의 모본도 되어주셨다.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성도의 견인을 끝까지 도우시는 책임이 그것이다.

‘어린 왕자’를 덮으며, 우리 교회가 사막의 우물과도 같이 사랑의 공동체로서 메마른 세상을 적셔나가는 소임을 다하게 되길 소망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