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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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범죄는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혹은 욕망을 자극하고 이에 굴복했을 때 죄에 이르게 만든다(야고보서 1:14, 15). 유혹은 어디서 오며 욕망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사탄을 가리켜 시험(유혹, temper)하는 자라 일컫고 있다(마태복음 4:3).

욕심(desire)의 삼원색
아담의 범죄 이후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죄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육의 열매를 맺게 했다. 성경은 죄로 이끄는 세 종류의 욕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마치 색의 삼원색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요한일서 2:15, 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일서 2:15, 16).

첫째로 ‘육신(헬: 사륵스)의 정욕(헬: 에피뒤미아)’이다. 일반적으로 정욕으로 표현되는 헬라어 ‘에피뒤미아’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다. 마치 칼이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되면 해로운 것이지만,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면 이로운 것처럼 칼 자체를 해롭다거나 이롭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피뒤미아’는 종종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을 표현할 때 ‘사모한다’는 단어로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한다(디모데전서 3:1). 하지만 ‘육신의’라는 말이 붙게 되면 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면 육신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은 ‘잘못된 성욕’, ‘시기심’, ‘우상숭배’, ‘미신행위’, ‘방탕함(뻔뻔스러움)’, ‘분냄’, ‘술 취함’, ‘탐욕’등으로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하나님과 적대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갈라디아서 5:16, 19-21).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헬: 사륵스)의 욕심(헬: 에피뒤미아)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16, 19-21).

둘째로 ‘안목의 정욕’은 상상이나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하여 받게 되는 유혹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거나, 눈으로 보이는 것이 부정적인 데도 그대로 따라 하려는 욕망 등을 일컫는다.

셋째로 이생의 자랑은 허풍적인 자랑으로, 세속적이라고 분류되는 외형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포함한다.

실패한 아담과 하와,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먹는 것이 금지되었던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했던 존재는 사탄이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동급이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다. 선악과를 보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욕망(헬: 에피뒤미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배고픔의 욕망(헬: 에피뒤미아)이 없다면 우리 몸에 필수적인 음식을 먹으려 할까? 그러나 먹음직스러운 배고픔의 욕망(식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이 배고픔의 욕망은 ‘육체의 정욕’이 되는 것이고 눈으로 보기에 ‘먹음직함’은 ‘안목의 정욕’이 되는 것이다. 칼 자체는 이롭다 해롭다 말할 수 없지만, 그 칼로 남을 해하는 순간 해로운 도구가 되는 이치와 같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세기 3:6).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실패하도록 유혹했던 사탄은 이제 공생애의 사역을 막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다(마태복음 4:1-11).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고픔의 욕망(헬: 에피뒤미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그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유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알리며 고난받는 종으로서 오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 중 받았던 신명기 말씀을 인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으로 군림하며 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목의 정욕’으로 이끌려는 사탄의 전략이 읽히는 대목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이 구하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유혹까지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열매를 맺는 길을 피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또한 보이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태복음 4: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이끌리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는 욕망(헬: 에피뒤미아)이 해롭게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5:24).

우리가 정욕으로 이끌리는 유혹을 받을 때 우리를 돕는 분이 계신다. 그는 이미 같은 유혹을 받았고 그것을 물리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며 우리를 기꺼이 도우신다(히브리서 2:18, 4:15).

“그가 시험(유혹)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유혹)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