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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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일합병조약의 무효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시위를 하여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이 만세운동 또는 독립운동 기간 동안 시위 참여 인원이 106만명, 사망 7,509명, 구속 47,000여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숫자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바 대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전파한 인물들을 보면 기독교 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과 졸업생들이 많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하여 그 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니, 내년 2019년이 바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된다.(정부에서는 건국 100주년 기념을 검토하고 있다.)

삼일운동 직후 한성(서울), 연해주, 상해에 각각 세워진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임시정부로 만드는 일에 있어서, 안창호, 이동휘 등 기독교 인사들이 기독교적 정신으로 통합을 이끌었다.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우리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헌법 제정, 정치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것, 입법, 사법, 행정 삼권분립을 시행하는 것 등 정부의 모든 틀을 만드는 실무적인 일에 있어서도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대 내각 9명중 6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김규식 등 많은 유력한 인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정부수립까지 이른 바 해방공간에서도 한국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여기에는 친일과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데서 오는 부정적인 평가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전례 없이 극도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냉전체제의 시발점에서 자유진영에 속하는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해방 전후를 막론하고 당시 기독교 인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상황에서 이렇게 기독교 인사들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큰 자부심을 가지고 동시에 책임감을 느낄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가 매우 짧지만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매우 큰 역할을 감당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의 결실이 들어있다.

물론 선교사들이 다 똑같은 입장이었다고 할 수는 없고 각기 개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단과 파송 교회의 성격에 따라 판이한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한말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시대까지 선교사들의 입장과 태도가 어떤 성향이었는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말 초기 선교사(1894~1905)
공식적으로 개신교의 선교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항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함께 입국한 날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로서는 이들 두 사람이 처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조선 입국을 준비하면서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이미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와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듣고 세례받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사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이전인 1883년에 황해도 장연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를 세운 서상륜, 서경조는 인삼장수로 왕래하던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매클레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 선교사가 번역하였다고 알려진 성경은 실제로 서상륜이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천주교사에서는 이승훈이 처음 세례를 받은 1784년이 원년이다. 한국 천주교는 외부 선교사의 주도적 선교활동 없이 실학이라는 학문을 위해 자발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선의 붕당정치와 서양제국들의 침략 앞에서 자국을 지키려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희생 제물이 되어서, 극도의 탄압 속에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선교사는 추방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선교 200주년이 되던 1984년에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고, 그 후에 123명의 복자 시복식이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그런 박해와 순교가 없이 상대적으로 순탄하게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조선정부가 선교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교육, 의료 등의 활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선교를 하였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 초기 선교사들은 예수교학당(경신학교),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경우와,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중원을 세운 알렌과 그를 도운 혜론, 평양에서 활동한 홀 등 의료선교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헐버트와 베델 등 언론에 공헌을 한 문서선교 활동을 한 경우도 있다.

초기 선교사들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입국하였으며, 서양의 앞선 문물을 소개하고 근대적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짧은 기간 안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내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기 (1905~1919)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열강 제국들 중에서 조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1905년 조선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방과 외교권을 빼앗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 강제로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약한 이웃나라의 국권을 빼앗는 만행을 보고 수많은 조선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것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본국에 대하여 일본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분할 전쟁 중이던 각국은 이해관계에 따라 오히려 선교사를 침묵하도록 강요한다. 미국의 경우 러일전쟁 종전 이전에 이미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보호령화를 용인하는 밀약을 체결했다(카쓰라 태프트 밀약). 미국 국민의 일본에 주변국 점령정책에 대한 반감과 일본인의 미국에서 인종차별로 인하여 악화되었던 미일 관계는 1908년 루트 다카히라 협정으로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미국은 선교사들에게 한국문제에 개입하거나 일제와 대립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모든 선교사들이 회람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은 선교사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에게 선교 자유와 기독교교육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미력한 유아기의 교회를 보호 육성하기 위해 일제와 상호협력하는 입장을 지켰고, 일제의 지배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간에 교인들에 일제에 대하여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진정시키고 달랬다.

사회 정의의 실현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악에 대한 저항보다는 인내와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사회구조적 악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죄악에 대한 회개에 관심을 쏟았다.
1907년의 이른바 평양 대부흥운동도 결국 이런 성격의 ‘회개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