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찬바람이 부는 날은 남섬이 수상쩍다. 우박을 동반한 찬바람이 부는 게야. 멀고 높은 산간지역에 눈이라도 내린 게야. 오늘처럼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좋다. 파란하늘을 볼 수 있으면 더 좋다.
계절은 분명히 여름이다. 짙은 녹색의 색깔이 그러하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둥둥 떠가는 구름과 조화를 이루는 산수가 그 증좌이다. 좌우 앞면이 툭 터진 잔디밭에서 바람 바라기하는 야생오리가 여름의 대변자이다. 무릎팍이 너덜한 반바지가 어울리는 대머리총각의 살내음이 여름냄새이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남반구는 여름이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북반구는 겨울에 기운다. 사계절의 불순환은 인간사마저도 악순환의 연속이다. 내 생각, 내 뜻과는 별개로 계절은 어김없이 세월을 한 움큼씩 삼켜 버린다. 계절의 희비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쉬움은 저만치서 손짓한다. 넘겨버린 월력에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가버린 세월은 무채색이다. 오고 맞을 세월은 유채색일까.
아침에 묵상한 성경구절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0:42).
예수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가? 앞집 뒷집의 어린아이들이다, 어퍼퀸스트리트를 배외하는 노숙자들이다. 파파토이 텐트 촌에 사는 저소득층이다.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처절한 삶을 사는 빈자들이다. 죽을 힘을 다해도 연전연패만 쌓아가는 불쌍한 인생들이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사는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조차도 예수님은 기억하신다는 약속이다. 냉수 두 그릇도 아닌 냉수 한 그릇이다. 눈을 들어 주위만 살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뜻한 손길만 주어도 된다. 작은 관심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사형수의 개탄이다.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이 너무 컸다.’ 재산 7조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중국 조폭 두목의 피 끓는 고백이다.
그는 경쟁상대의 인물 8명을 죽인 살인자이다. 사업확장을 위한 일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그의 손에서는 악의 꽃이 핀다. 그가 피운 악의 꽃들이 그에게 11개 혐의의 상급을 가져다 주었다. 법정에 선 그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다. 최후의 만찬 한 그릇을 비운 뒤에 잿빛하늘을 응시한다. 후회가 밀물처럼 전신을 감싼다.
조물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은 누구에게나 하나이다. 삶의 시작도 끝도 1막이다. 조물주께서는 누구에게나 1막의 주연을 맡기신 것이다.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우리 인생의 끝자락에서 2막은 없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공허만이 허공에 피어난다.
탕탕탕 장총 몇 방에 서른 여섯 해의 짧은 삶은 공중 분해된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행복인데 저렇게 보면 불행이다. 행복과 불행의 속성은 양면성이다.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인생 모든 게 안개와 같다는 이치를 일찍 터득했다면 좋았지. 그리 모질게 살지는 않았지. 악의 대명사는 안되었지. 100m를 힘껏 달린 후에 마셨던 한 모금의 냉수는 갈증을 한번에 날려 준다. 한 모금의 냉수의 위력이 한 생명을 압도한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이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하거나 또는 희망을 그리는 좋은 감정으로의 심리적인 상태이다’(위키백과).
어느 부도 인생의 이야기이다. 한 순간에 재산도 날렸다. 살갑던 아내도 곁을 떠났다. 통장의 잔고는 빈지가 오래이다. 쌀독에는 거미가 줄을 친다. 냉수를 마셔도 빈 배에는 허기 탱천이다. 눈앞에는 허기를 달래줄 먹거리만 왔다 갔다 한다. 사흘 굶으면 누구나 도적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면서 먹잇감을 사냥한다. 사냥감은 어디에도 없다. 한끼 식사를 구걸하는 그를 맞아 주는 식당은 없다.
문전박대를 당하던 그에게 악마가 속삭인다. 모두 죽여 버려. 모두 불질러 버려. 모두 부셔 버려. 잔뜩 독이 올라 씩씩거리는 그의 눈앞에 허름한 국수집이 눈에 띈다. 주린 배나 채우고 끝장을 내자고 마음을 다진다. 분노가 포도처럼 영근 그가 삐걱대는 의자에 등을 기댄다.
국수 한 그릇 주세요. 주인 할머니가 내민 국수 한 그릇을 받아서 대충 삼키듯이 먹어 치운다. 국수 그릇이 비어 갈 무렵이다. 할머니는 그의 국수그릇을 나꾸어 채듯이 가져다가 국수를 한 그릇 가득히 담아준다. 마지막 한 올까지 마저 먹는다.
그의 수중에 국수 값이 있을 리가 없다. 의자를 박차고 어둠 속을 냅다 뛴다. 가게 문을 열고 뒤따라 나온 할머니의 고함 소리이다.
걸어가! 뛰지 말아! 다쳐! 괜찮아!
어둠을 내달아 도망가던 그가 땅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리고 큰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운다. 국수그릇에 녹아 배인 할머니의 사랑에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