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사랑,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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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사랑이 있을 때 풍요롭고, 살 맛이 나는 세상이 된다. 성경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로마서 3:8). 이렇게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큰 질문의 답을 찾아가려면 반역하고 죄를 범하여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자비, 긍휼, 인애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8). 사랑은 위대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큰 가치인데, 사랑에도 등급이 있을까? 성경은 더 큰(greater)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요한복음 15:13).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흔히 ‘위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자녀를 향한 모성애를 이야기한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을 투영하고 있다.

선지자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음탕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아내 ‘고멜’은 남편 호세아에게 결코 성실하지 못했다. 음탕한 여인과 함께 살지만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긍휼한 마음은, 우상숭배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성실했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때로는 경고하고, 때로는 절규하면서도 불성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긍휼을 불붙듯 쏟아내셨던 하나님, 여기서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함’이다. ‘라함’은 어원적으로 ‘자녀를 품고 있는 자궁’을 의미한다. ‘긍휼’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동일시’이다. 어머니와 자식이 자궁 안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를 통해 형성된 모성애, 이 모성애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한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window)과 같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히: 라함)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세아 11:8).

하지만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성애는 그 원천이 위대해도 현실 세계에서 종종 오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마음 아픈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오점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때로는 긍휼로, 또는 자비, 인애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perfect love)’이다(요한일서 4:18).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하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그 어떤 능력이나 사망이나 피조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 낼 수 없는(로마서 8:35, 38-39) 온전한 사랑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 38-3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큰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예가 바로‘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한일서 4:9).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은 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를 ‘희생’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으나 본인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의인’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 또한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삶이 난잡하고 무기력할 뿐 아니라 범죄자인 데다 원수이기까지 한 사람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난잡하고 무기력할 뿐 아니라 범죄자이며 원수일 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시다(로마서 5:6-8,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한일서 4:9).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6-8, 10).

말씀을 보면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를 친구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친구는 허물없이 반말도 하면서 지내는 사이 아닌가!

어떻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큰 사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큰 간격과 벽을 낮추고 하나님이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친구로 삼으신 것이다. 어떤 태도가 믿는 자의 바람직한 태도일까? 친구 삼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 존경과 영광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친구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복음 15:13-15).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사랑을 알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형제를 위해 목숨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교우를 시기하고 해를 끼칠 수 있을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