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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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을 위해 선택받은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답해 줄 하나님의 이름을 여쭈었고, 그때 하나님께서 답하신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I am -)’는 형태로 ‘나는 세상의 빛 (I am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태양의 빛과 참 빛
태양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태양이 빛과 열을 제공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식물은 빛을 사용하여 광합성이란 화학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저장한다. 동물들과 사람이 먹는 먹거리들이 이런 빛의 도움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폭염과 혹한을 자연재해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 한국에서 나오는 요즈음, 수만, 수억 도의 온도가 존재하는 우주에서 단지 폭염과 혹한의 60도 차이에도 일희일비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온도가 사람이 살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일찍이 태양이 지구에 미치는 이런 영향력으로 인해 고대인들은 태양을 신으로 떠받들었다. 이집트(애굽)는 태양신 ‘라’를 믿었고 대부분의 고대문화 가운데 태양은 신으로 숭앙받았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로마는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고대의 절대권력자들은 자주 자기 자신을 태양으로 비유하곤 하였는데, 애굽의 바로(왕)는 자신을 ‘태양신의 화신’ 또는 ‘태양신의 아들’이라 하며 자신의 신적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복음 1:9)이라고 말한다. 왜 ‘참 빛’이라고 했을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창세기 1:14-19)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빛을 통해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빛과 어둠, 태양,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이사야 45:7).

요한계시록에도 새 예루살렘을 해나 달의 비침이 없이도 하나님의 영광이 비쳐 충분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요한계시록 21:23).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태양의 빛과 비교할 수 없다.

‘참 빛’에 사용된 ‘참’의 헬라어 ‘알레디논’은 ‘거짓’의 반대를 뜻하는 ‘참’의 뜻이 아니고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이라는 의미의 ‘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는 사실은 이 땅의 ‘영적 어둠’의 세계에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시키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세기 1:2-4).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요한계시록 21:23-25).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빛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분별력을 주는 것이다. 예전 대학 시절에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편으로 2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대이작도 섬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산등성이에 학교가 한 채 지어져 있었고, 동네를 지나 다른 산등성이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도사이면서, 대이작도 섬의 유일한 교사인 한 부부가 교회와 학교 모두를 섬기고 있었다.

봉사 나온 대학생들은 1개뿐인(?) 학교 교실을 숙소로 하고,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동네를 지나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가기 위해 동네를 지나야 했는데 그곳은 낙도인지라 하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동네에는 도랑이 곳곳에 있었고, 그 도랑에는 가축의 분뇨와 생활하수가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이작도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들고 있는 손전등과 자동차 배터리를 이용해 교회 안에 켜 놓은 작은 전구가 유일한 빛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손전등은 더러운 도랑과 깨끗한 도로를 구별해주는 주요한 도구였다.

어두움 속에서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 빛이 비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이 세상이 영적으로 어두운 어둠의 상태일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의 더러운 죄악이 드러나고,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참 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오지 않고 어둠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요한복음 3:19).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사람은 스스로 빛일 수 없다. 하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달이 빛을 내듯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광의 빛을 받아 인간은 세상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게 되며 ‘빛의 아들’이 된다. 빛의 아들은 진리를 따르는 자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의 삶을 사는 자이다.

태양 빛이 광합성을 통해 식물로 열매를 맺게 하는 역할을 하듯, 빛의 자녀들이 되었을 때 빛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빛의 열매는 착함(헬: 아가도쉬네), 의로움(헬: 디카이오쉬네, 히:쩨데크), 진실함(헬: 알레테이아, 히:에메트)이다.

‘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도쉬네’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양선’으로 번역된 헬라어이기도 하다. 이 ‘아가도쉬네’는 단순한 선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선’이 성령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이듯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빛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열매라는 것이다.

‘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소산으로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태복음 5:14).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에베소서 5: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