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칼리프 시대(622~660년)
이슬람 운동은 메카를 중심으로 하여 예언자라고 일컬어지는 무함마드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유대교와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의 큰 영향을 받고 그 교리들을 종합하여 이슬람교를 만들었다.
무함마드가 메카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밀려나 메디나로 옮긴(헤지라) 622년이 이슬람 원년이 되었는데, 630년 메카를 정복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갔으니, 630년에 페르시아를, 638년에 예루살렘을,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였다.
유럽에서는 이 이슬람 운동으로 세워진 제국들을 사라센(사막의 아들)제국이라고 불렀다. 무함마드의 계승자인 칼리프는 종교적인 권위와 정치권력을 동시에 가진 제정일치국가의 수장이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그의 장인이었던 아부 바르크가 그를 계승하였고, 그를 이어 오마르 , 오스만, 알리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622~660년)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직접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항복을 받아낸 오마르는 옛 솔로몬 성전터에 예배 처를 삼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였던 이곳은 이후 이슬람의 성지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니, 오늘날 알 아크사 모스크가 서 있다.
우마이야조(660~750)
칼리프 알리가 죽은 후 아랍의 실력자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모여 무아위야를 신자들의 사령관, 칼리프로 선출하였고 이로부터 우마이야조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조는 북아프리카로 그 세력을 확장하여 697년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715년에는 현재 스페인에 해당하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슬람이 점령한 이 지역은 이미 수 백 년 동안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동쪽은 오늘날 파키스탄에까지 이르렀다.
무아위야의 통치는 비교적 정의롭고 평화롭고 관용적이었다고 한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정착하도록 도왔고, 성전 지성소가 있던 자리에서 기도하도록 허용하여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이 새긴 메노라(촛대)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아울러 그는 성전산에 최초의 모스크를 지었다.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를 계승하였을 때 4대 칼리프 알리의 아들, 곧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세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결정적으로 나뉘어졌다.
685년에 칼리프가 된 압드 알 말리크 때에 꾸란의 최종 판이 완성되어 나왔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가 수집되었다.
압바스조(750~969)
750년 무함마드의 삼촌인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와 만수르는 시아파 이란인 이슬람교도들과 협력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고 압바스 왕조를 열었고, 이라크 남부의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여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었다.
압바스 왕조는 재상을 중심으로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는데, 아랍인의 특권이 부정되어 주요 요직에는 이란인이 등용되었고, 궁정의 친위대도 이란인과 투르크인 노예병사(맘루크) 위주로 구성하였다. 압바스 왕조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고, 민족차별을 폐지하여 이슬람법에 기초하여 통치하여 오늘날 아랍세계의 기초를 닦았다.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 대제는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를 축복하였고 서로 사절단을 교환하였다. 하룬은 샤를마뉴에게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구역을 조성하고 150명의 수도사와 17명의 수녀들이 상주하는 수녀원, 도서관, 순례자 숙소를 짓는 것을 허용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과 이슬람인은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나, 압바스 왕조는 각 지방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실권을 가진 총독들이 점차 독립하면서 칼리프의 권력이 서서히 약화 되었다. 10세기 초에는 북부 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일어나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부정하자, 스페인 코르토바를 중심으로 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군주도 칼리프라 칭하며 이슬람 세계는 3인의 칼리프 체제가 이어졌다.
압바스 왕조는 1258년 2월 10일,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바그다드 칼리프 시대는 끝났고, 카이로로 이동한 후 1517년 오토만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다.
파티마조(969~1099)
899년 시리아의 부유한 상인 우바이드 알라는 자신을 살아있는 이맘이자 파티마(무함마드의 딸)와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직계 후손으로 선언했다.
압바스조가 그를 죽이려 하자 잠적했던 그는 몇 년 후 튀니지에서 다시 나타나 스스로 독자적인 칼리프가 되어 세계를 구원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제국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969년 무이즈는 이집트를 정복했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며, 973년 수도를 알 카히라 알 무이지야(무이즈의 정복지)로 옮겼으니 그곳이 지금의 카이로이다.
칼리프 하킴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문을 닫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었다. 그는 부활절과 포도주를 금지하였으니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겨냥한 조치였다. 그런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교 의식 하나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마다 동로마 지역과 서로마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는데, 부활절 성금요일 다음날인 성토요일 밤 성묘교회에서 거룩한 불의 강림 행사가 있었다. 하늘에서 불똥이 내려와 불꽃이 일면서 빛이 퍼지고 대주교가 신비롭게 빛나는 등잔을 들고 나타나 군중들이 가진 초에 초를 이어 불을 붙였다. 하킴은 이것을 금하기 위하여 성묘교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미친 칼리프 하킴은 어느 날 증발되었다.
십자군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유력자들과 일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교회를 해방시키자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라틴 기독교(서방 카톨릭)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동방 정교)는 서로 크게 달라졌다. 1054년 교황 특사가 비잔틴 대주교를 파문하고 비잔틴 대주교는 격분하여 로마 교황을 파문하였다. 곧 동서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제들의 서임권을 둘러싸고 1075년경부터 시작하여 투쟁이 벌어졌다.
우르바누스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소환한 것은 그리스도교와 교황청을 부활시키기 위한 성전의 새로운 논리였다. 죄의 구속을 대가로 이교도 청산을 합리화시킴과 아울러 수 백 년 동안 견고하게 자리잡은 중세봉건 질서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변화를 소망하는 숨통을 제공했다.
미친 칼리프 하킴의 순례자들의 학살과 성묘교회의 파괴는 십자군 동원의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신의 뜻이다”라는 명분으로 우르바누스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십자군은 1095~1099년의 제 1차부터 시작하여 1271~1272년의 제9차 십자군까지 총 9회차로 구분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실제로 예루살렘까지 도달하지 못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과 지중해 동쪽 해안지역을 점령하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등 4개 나라를 만들었고, 십자군에 동조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을 세웠다.
십자군이 세운 이 나라들을 프랑스 말로‘해외의’‘바다 건너의’라는 뜻의 말인 우트르메르(Outremer)라고 부른다. 십자군은 당초에 내세웠던 명분대로 이슬람에게 빼앗긴 비잔틴제국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확보했던 우트르메르도 유지하지 못하고 200여년 후인 1291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십자군은 분명히 서양문명사에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하였고,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상공화국들이 번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제1차를 제외하고는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달하지도 못하였고, 명분과 도덕적으로 모순되는 행동을 하였다. 이른바 민중 십자군은 유대인을 학살한 라인란트 학살을 벌였고, 제4차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약탈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사례도 있었다. 유일하게 성공한 제1차 십자군조차 그 내막은 학살과 약탈로 얼룩졌다. 십자군은 이제 부끄러운 역사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