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삶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

태국에 함께 있던 친구들은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한 친구의 집에 가서 자고 오게 되었다. 산지 마을 친구들 대부분은 멀리, 그리고 높이 산다. 그래서 시내에서도 두 시간을 간 후 사륜 자동차가 아니면 올라가기 힘든 꼬불꼬불한 길을 3시간 정도는 올라야 갈 수 있는 곳에서 사는 게 다반수다.

내가 가게 된 친구의 집 또한 그랬다. 가면서 유명한 곳들도 있어 둘러보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가는데 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여정이 멀미를 하는 나에겐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놀랬던 것은 이 힘든 길을, 예전에 선교사들은 산에서 이 길을 개척해서 걸어 올라갔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헌신인 것 같다.

우리가 간 마을은 아주 작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자신만만한 부분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수상마을에서도 있었는데 산지마을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교만은 하루도 못 지나 무너졌다.

그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집들은 문도 제대로 없었고 창문은 그냥 뚫려있는 부분을 창문이라 불렀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집 밑에는 돼지를 한 마리씩 키웠다. 집은 방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고 들어와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전부였다.

그 마을에서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시간을 많이 쏟는 부분은 밥을 해먹는 것이었다. 전기는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작은 전구 정도를 밝힐 수 있는 전기였기 때문에 밥은 정말 전통적인 방법으로 지어졌다. 아침에 눈 뜨면 밥을 하고 또 점심, 저녁 그렇게 밥을 하는 게 일과 중 큰 부분이었다. 보통 산에 사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 풀과 곡식 등을 많이 먹었으며 특별히 우리와 같이 손님이 오는 날엔 라면 같은 게 특식이라고 했다. 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이 없어서 선교사와 지내고 있는 아이들은 야채를 거의 안 먹었었다. 평소에 집에서 너무 많이 먹으니까 반찬에 야채가 있어도 편식이 심했고 고기를 거의 매일 먹었었기에 고기를 좋아하는 나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 마을에 와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갔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밥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다. 그곳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작지만 예쁜 학교였고 아이들은 적었지만 나름의 규율에 맞춰 수업하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너무 작고 먼 학교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사들이 아니라 그곳의 주민들이 교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이 너무 적어서 대부분 교사를 해도 대충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래도 과연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하는 걸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들었다.

초등학교 이상이 되면 중학교부터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대부분 학교를 가지 못하고 농사를 돕게 된다. 그래서 그 마을엔 어리게는 15살인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마을을 돌아보며 감동받았던 부분은 그 마을엔 교회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새로 크게 짓고 있었다. 원래 교회가 있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져서 수용할 수 없게 되어 하나를 더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짓는 데에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했다고 들었다.

원래 사람들이 선교사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여기 사람들은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지 않고 자진하여 서로가 적더라도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데에 노력했다는 점이 와 닿았다.

나는 교회에서 건축 헌금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해 봤는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의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데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던 것 같다.

정말. 금방 심심해졌다. 산에서 노는 거 외에는 할게 없으니 어느 정도 크면 아직 어린데도 아이를 가지거나 하게 되는 상황이 왜 그런지 이해는 되지만 안타까웠다.

세상의 시끌벅적함에서 떨어져 정말 평화로운 곳이긴 했지만 나는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단순히 단조로움이 싫다기 보다는 삶에서 비 그리스도적인 것에 부딪히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연습이 나는 더 익숙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산지마을 사람들과 직접 살며 선교를 하려다 환경적인 것과 생각차이가 너무 힘들어 1년이 안되어 내려간다고 했다.

너무 평화롭기 때문에 이곳 출신 목사들이 다른 곳은 안가고 자기 마을에서만 목회를 하려는 모습도 있다고 했다. 다른 곳은 자기에게도 모험이니 힘드니까 편한 곳에서 하려는 것이다. 이해는 되고 정죄할 수 없지만 그런 마음이 과연 맞을까 라는 생각은 든다.

너무나 더웠던 낮에 비해 너무 추운 밤은 카투만두패딩을 입고 이불을 몇 겹씩 껴입고 잔 나에게 감기를 주었고 그렇게 두껍게 입고 잤는데도 나는 다음날 모기테러를 당했다. 모기인지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다녀와서 벌레 물린 곳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누군가와 함께 그들의 삶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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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정
더니든에 있는 오타고 대학교 졸업. 약사. 사랑의교회 청년. 약사로 일하다가 1년 내려놓고 캄보디아와 태국 선교지에서 반년을 있었고, 나머지 반년은 한국과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시간을 갖고 돌아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