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나님의 아들

금요일 저녁 때가 되었을 때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부탁하여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게 된다. 요셉은 공의회 회원이자 부자이며 예수의 숨은 제자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새 묘지에 안치하는데 당시 묘지는 동굴처럼 되어 있고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게 되어 있었다.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을 예수를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봐두었다가 이틀 후인 일요일 이른 아침에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주고자 그 묘지를 찾아간다.

이들이 그 날에 간 것은 그 전날인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묘지로 가면서 묘지 앞에 닫혀있는 큰 바위를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하였다.

그런데 막상 묘지에 도착했을 때 묘지를 막았던 큰 바위는 누군가에 의해 옮겨져 있고 묘지 안에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채 비워있었다. 그리고 이들 앞에 천사처럼 흰 옷 입은 자가 나타나 예수가 다시 살아났음을 알려주고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여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 중 베드로와 요한은 직접 무덤에 쫓아가서 빈 무덤을 확인한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 안에는 예수의 시신을 감싼 세마포만 한쪽에 곱게 접혀 있었다.

이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한 후 처음으로 나타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났으며 이들의 말을 믿지 않은 다른 열 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한 후 사십 일 동안 이 세상에 머물다 승천(사도행전 1:3)하였으며, 약 오백여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걸로 되어있다(고린도전서 15:6).

이상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예수와의 1차 인터뷰 때 그가 말한 십자가 죽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과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보다 예수의 태도를 들 수 있다. 물론 그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과 3일 후 부활할 것을 예언(마태복음 16:21, 마가복음 10:32-34)한 바 있어서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보인 그의 태도는 단순히 예견된 일을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그 일을 성사시키려는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심문 때 다른 죄목들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다가‘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과 구름 타고 올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 자신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구세주)임을 선언한 것이다. 구약 시대에‘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천사에게도 사용(욥기 1:6, 2:1)되었고,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호세아 1:10)에게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예수가‘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과 구름 타고 올 것’을 덧붙인 것은 그러한 은유적 표현으로서의‘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의미를 확인한 것이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격의 권능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대제사장이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상상한 구세주는 과거 시내산에 강림하였던 하나님처럼 어마어마한 위용을 갖추고 눈앞의 압제자인 로마 제국을 단번에 쳐부수고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엄청나게 강한 모습이어야 하는데 보기에도 초라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스스로를 구세주라고 하니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이들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를 리 없는 예수가 왜 이런 선언을 한 걸까? 그 동안에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자신을 보고‘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16:16)이라는 고백을 할 때 이를 조심시키고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태복음 16:20)고 까지 하고는 말이다. 예수는 지금 십자가 죽음을 피하면 큰일 날 사람처럼 그것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것은 예수만 십자가 죽음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을 비롯해 유대인 전체가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했으나 민란이 날까 봐 명절에는 피하려고 했다(마태복음 26:5, 마가복음 14:1-2).

그런데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가‘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자 그때부터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이들이 얼마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싶어했는가는 예수의 재판이 모든 이성적 법적 절차가 무시된 채 진행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원래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재판은 밤이나 명절 기간에는 열지 않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피고인은 변호인을 세울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선고는 재판관들의 투표에 의해 정해지며 사형 선고의 경우 반드시 처형은 하룻밤을 넘긴 후에 집행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예수의 경우 이런 모든 법적 절차가 무시된 채 진행되었고 그의 사형 집행은 선고된 당일에 이루어졌다. 물론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라 그 어떤 일도 진행할 수 없었으니 서둘러 처형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들이 예수를 미워했다고 해도 목요일 밤과 금요일 오전에 걸쳐 이들이 행한 모습은 제 정신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또 한 가지 짚어볼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를 향해‘네가 구세주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스스로 구원해 보라’고 조롱한 점이다.

이들의 발언은 예수가 40일 간 금식 후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사탄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 덩이를 떡으로 만들어 보라’라든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 말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즉 사탄이나 그로부터 조종을 받는 세력은 교묘하게 예수가 행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하는 예수로 하여금 그가 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해보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얼핏 보기에는‘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합리적 테스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이라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피조물의 시험을 받겠는가? 그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을 때 제자 베드로가 그를 생각해서 결코 그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꾸짖었던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6:22-23).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죄 없는 사람이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을 당한 경우나 의인이 악인에 의해 핍박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중요한 일로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와 약속 가운데 행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었고 그는 그 예언을 성취하고자 한다고 했다.

실제 신학자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수를 예언한 대목이 6백여 군데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이사야서 53장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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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연세대 졸업. 한국 워킹우먼 전 편집장. 해밀턴 지구촌교회에서 집사로 섬기고 있는데, 201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2년 여의 항암 투병기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만난 예수를 인터뷰 형식으로 쉽게 풀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음의 핵심을 함께 나누고자 이 글을 썼다. 2018년 1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유고를 분재한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른 시각의 기사가 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