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을 도왔던 2세대 개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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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인 개혁자들에 의해 종교 개혁의 불을 지폈다. 그러나 그 뒤에서 그들의 개혁을 도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않은 또다른 개혁자들이 있었기에 그 개혁을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을 간략하게나마 조명해보고자 한다.

루터의 측근, 루터 사후 종교개혁의 주도자 필립 멜란히톤
그는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독일 종교개혁자이다. 1497년 2월16일 브레텐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고어 습득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고, 그의 나이 21살일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1523년에 대학 총장이 되어 필요한 개혁을 실제로 실천하였다.

해가 거듭되는 종교개혁 과정 속에서 그는 루터의 측근이 되어 함께 종교개혁을 위하여 수많은 저서, 학교 교칙, 예배 교안 등을 집필하였고, 공동으로 성서도 번역하였다. 또한, 역사적인 개신교 신앙고백서“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집필하였다.

1546년 루터 사후, 그는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자 그룹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당시 새로이 선제후직을 승계한 모리츠 폰 작센을 위한 신학고문관이 되었고, 그 지위 덕분에 슈말칼덴 전쟁 이후에도 비텐베르크 대학의 존립을 지킬 수 있었다.

지역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 넘은 하인리히 불링거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그는 취리히 안에서만 개혁교회를 펼쳐 나갔던 것이 아니라 스위스 전역과 유럽 전역에 있어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조언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칼빈 등 스위스와 전 유럽의 목회자, 정치가 1000여 명과 12,000통의 서신을 교환하며 종교개혁에 있어서 교회 일치와 연합 정신을 중요시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추구한 것이다. 그의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동시에 추구한 츠빙글리를 계승해 교회와 시민 사회를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로 간주한 것이다.

1531년 27살의 나이로 취리히 시 대표 목사가 된 불링거는 7만 여명의 인구를 가진 취리히 도시 국가에서 130여명 목사들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쯔빙글리가 미완으로 남겨둔 종교 개혁의 과제를 제도적으로 발전시키고 취리히교회를 유럽 개신교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 나간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신학 조언자이며 지도자였다.

그는 그의 저술 ‘50편의 신학적 설교’ 등을 통해 개혁교회 목회자들의 신앙적 교양을 형성하는데 기여했고 그가 작성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은 당시 16세기와 17세기 스위스와 유럽 전역에서 공동의 신앙 고백으로 지지를 받고 오늘날에도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평가 받고 있다.

칼빈의 개혁과 개신교 신학의 밑거름 된 마틴 부쳐
그는 결혼으로 파문을 당하지만, 성 토마스 교회에서 사제가 아닌 목사로서 목회하면서 개혁 사상의 열렬한 수호자가 되어, 칼빈에게도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쳐 성숙한 개혁자가 되는데 이바지한다.

그는 기욤과 함께 1506년-1541년까지 주교였던 자신에게 속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시도하므로, 1524년에는 자신들의 언어인 독일어 미사를 시작하고 나아가 교회 안에서 비성경적인 가톨릭 요소들을 제거하였고, 카톨릭 예식 철폐 및 성상(聖像)들을 철거하며 사제들을 추방하였다. 그는 1551년 2월 28일 캠브리지에서 죽어 대학 교회에 안장됐으며, 장례식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3,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그 후 피의 여왕이며 카톨릭 시대로 되돌린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 그의 유해가 파헤쳐져 캠브리지 시장 광장 나무기둥에 묶인 채 불태워졌다. 그러나 메리 튜더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3년 후 엘리자베스 1세 즉위 후 엄숙히 사면되었고 그의 무덤은 가묘로 복구되었다.

개혁교회 사상의 전도사, 테오도레 베자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의 제자 테오도레 베자(1516-1605)는 로마 카톨릭 측과 루터파측, 그리고 개혁교회 측(칼빈파)이 교리상의 문제(주로 성만찬)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개혁교회의 대변자로 활약하면서 서로의 화해와 일치를 향해 동분서주했던 개혁자였다.

그는 칼빈의 개혁사상을 ‘칼빈주의’ 라는 옷을 입혀 전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산시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어 가면서 개혁세력이 다양한 교파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성서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교회의 패러다임을 늘 새롭게 하는데 노력했다.

그는 칼빈의 사후 제네바의 종교개혁운동의 지도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칼빈이 설계해 놓은 신학을 그는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칼빈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개신교 스콜라주의” 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는다. 베자의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분야는 역시 신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성서분야에서 그는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른바‘베자사본’(Codex Bezae)으로 불리는 그의 헬라어 신약성서는 당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다.

베자는 리용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된 헬라어 신약성서에다가 불게이트(제롬의 라틴어 성서)판과 자신의 라틴어 대역을 함께 실어 출판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를 대중화시키는 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베자사본’ 은 후에 ‘제네바 성경’(1560)과 ‘흠정역’(킹 제임스 역, 1611)의 원본이 되었다.

성공회의 기틀을 다진 토마스 크랜머
그는 영국 노팅엄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때부터 루터의 영향을 받아 1549년 영문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고, 아침, 저녁 기도와 감사성찬례때마다 영문 성서를 쓰도록 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 전통은 세계성공회공동체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말로 만든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신자인 메리 1세의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등과 함께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강요와 회유공작을 받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 끝에 개신교 믿음을 버린다는 믿음철회서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꾸고 순교하였는데, 순교 직전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손을 불에 집어넣었다.

그는 화형대에서 강요와 회유공작으로 개신교 신앙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며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 손이 가장 먼저 불에 타야 한다면서“교황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라 말하고 화형대에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