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 구원 위한 거룩한 전쟁 선포한 윌리엄 부스

시민들이 세운 윌리엄 부스 동상앞에서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는 불평등한 세상과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 대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런던의 빈민지역에서 설교를 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면 중산층 신도들은 술 취한 부랑자들을 교회에 들인다며 이들의 출입을 막았다.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는 교회의 현실에 절망한 그는 기독교인이라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1865년 구세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구세군을 통하여 박애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봉사를 실천하려고 했다. 기독교 정신에 따른 사회선교를 강조하는 구세군 운동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특히 자본주의의 발달로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는 누리지 못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구세군 운동에 호응하였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

윌리엄 부스는 복음을 전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정신력과 조직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 기독교 선교회로 불렸던 그들의 모임은 전도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날 즈음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의미의 구세군이 되었다. 그래서 구세군 조직은 대부분 군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세군은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 그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잘못된 사회구조로 인하여 고통 받고 소외된 자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전인적 구원을 그 선교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선교정신에서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an)’라는 선교 모토를 갖고 지난 150년간 발전해 왔다.

‘가라! 영혼에게로, 극악한 자에게로!’라는 윌리엄 부스의 외침과 복음적 열정을 따라 그들은 주로 거리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대중을 향해 나갔다.

당시 영국사회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빈민과 실직자들이 거리에 즐비하였다. 구세군의 전투적인 복음전도의 방법은 때로 반대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힘을 잃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그리스도 안에 새 삶의 희망을 갖게 하였다. 특히 오늘날 사회복지의 고전으로 알려진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저서‘저 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는 19세기말, 영국사회를 일깨우며 구세군의 존재와 위력을 널리 알리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윌리엄 부스에게 큰 힘이 되어준 동역자 캐서린 부스

윌리엄의 아내 캐서린 부스도 열정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남편을 받쳐준 큰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 자신도 여성 설교자가 되어 열정적인 설교를 하여 신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었던 시대였으나 구세군 교단은 선진적인 남녀 지위에 관한 제도를 갖추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여성에게는‘목사’는 물론이고‘장로’도 허용되지 않았으나, 구세군 헌장에는 남녀의 구별 자체가 없었다. 여성도 구세군의 최고 계급인‘대장’이 될 수 있었다.

캐서린은 ‘아동 성매매 금지 법안’을 촉구하고, 열악한 성냥 공장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에도 적극 나섰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성냥의 재료로 비싼 적린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저렴하나 인체에 매우 유해한 황린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린을 금지하자는 청원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자 윌리엄은 아내가 죽은 다음 해에 적린을 사용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였고, 이후 영국에는 황린을 사용하는 성냥공장이 없어졌다.

윌리엄 부스의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
그는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고통 중인 고령의 83세까지도 영국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고 구제사역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1905년 영국의 겨울은 가장 불행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런던에서만 8,000여명의 배고픈 사람이 발생되어 시내에서 웨스트 앤드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그 때 구세군은 매일 새벽 2-3시 사이에 구세군 급식소에서 약 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더운 음식을 제공하였고, 하역하는 일을 얻고자 새벽에 부둣가에 나와 떨면서 기다리고 있는 실직자 600여명에게도 매일 아침식사를 제공하였다.


노숙자 숙소 부스 하우스

그는 도시빈민지역에 있는 빈곤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서 영적전투를 할 때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욥기31:32)”라는 말씀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 35-36)말씀에 근거하여 사역했다.

1912년 8월 20일 오후 10시 13분에 83세로 윌리엄 부스가 영적 전투의 성검을 놓자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 구세군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 했으나 구세군은 여전히 지금도 세계 128개 나라에서 복음전도 사역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해 봉사하는 지구촌의 선한 이웃으로 150년 동안 활동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태복음 20:28, 마가복음 10:45)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실천을 위해 선한 싸움을 다 싸우다가 간 윌리엄 부스의 장례는 시민 장으로 치러졌고, 65만명의 조문객들은 그의 생애는 가난한 사람의 재난을 위해 깊이 동정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선포하는 사역이었다고 얘기 했다.

지금도 영국 동부 런던에 가면 윌리엄 부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동상은 구세군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동부 런던 빈민들의 친구였으며, 산업혁명 이후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는 영국 사회를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암 부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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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