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러시아 사람을 만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듣고 있는 노래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경치도, 맛있는 음식도, 흥미로운 놀이거리도 잠깐의 기쁨과 감동을 줄 순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어진 다양하고 유니크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는 그 반가움에는 비할 수 없다.

러시아를 직접 경험해보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참으로 어둡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던 키워드는 푸틴 대통령, KGB, 살벌한 군인들, 소비에트 국기와 장기에프, 로봇을 방불케 하는 올림픽 체조, 총, 탱크, 샤라포바, 막시즘, 우리 동포 고려인, 블라디보스톡, 스탈린 등이었다.

샤라포바와 고려인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거칠고 우락부락한 키워드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키워드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 친한 친구의 아는 형님은 수년 전에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 마스크를 쓴 백인 괴한의 흉기에 목을 찔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고 했고….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한 재일조선인 선생님께서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님의 묘지 주변에 떨어져있는 총알 탄피를 여러 개 보았다고 하셨다.

그 외에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러시아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무차별적인 묻지마 동양인 공격 사건 등……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하나의 호러 모음집으로 묶여 내 머릿속에 ‘러시아 여행, 생존만 하면 감사한 땅’이라는 제목의 ‘스캐어리 플래닛’ 소책자가 되어 여행 준비 내내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땅에 도착한 첫날, 눈을 씻고 둘러봐도 영어 안내 표지판을 찾아보기 힘든 블라디보스톡 공항에서 300루블에 블라디보스톡 시내까지 가는 봉고차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저녁, 거기서부터 꽃보다 아름다운 러시아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작됐다.

은색벤츠를 탄 수상한 천사들
블라디미르는(짧게 불러 보바) 봉고차 안에서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러시아 청년이다. 사할린에 있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회사에 뉴질랜드인도 한 명 있다며 나를 반가워했다.

봉고차가 달린지 30분쯤 지나 보바의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이 친구 갑자기 나에게 숙소가 어디냐 물으며 밤이 늦었으니 시내입구까지만 가는 봉고보다는 자기를 픽업하러 오는 사촌누나의 차를 타고 숙소까지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며 함께 내리자고 제안했다. 순간 고민했다.

비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로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현지인들을 조심하라는 솔로여행자 십계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은 악마이거나 천사이거나 둘 중 하나라던데…… 하지만 이 친구, 왠지 믿음이 가는 선한 인상이다.

나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하고 밤 10시가 조금 넘은 그 시각,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 곳에서 나는 보바와 함께 봉고에서 내렸다. 도로 곁길에는 세련된 S-class 은색 벤츠 한 대가 서있었고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러시아 여성이 운전석에서 내려 보바와 포옹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짧게 나를 소개해준 보바는 나의 숙소 주소를 사촌누나에게 보여주며 그 곳으로 먼저 가자고 했다(라고 말했다고 믿고 싶었다…).

시내 한복판에 진입하자 밝은 가로등이 많이 보였고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 10분 후에 벤츠는 약속대로 나의 호스텔 문 앞에 도착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보바의 사촌누나는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보바는 혹시라도 말이 안 통할까 봐 호스텔 리셉션에서 체크인까지 도와주었다.

러시아 대륙에서 맞이하는 첫날 밤 나는 그 어느 타지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Door-to-door 벤츠택시 서비스를 체험했다.

이틀 후 러시아 심 카드를 장착한 나는 보바의 번호로 다시 한번 감사의 문자를 보냈고 그 또한 좋은 여행 하라며 답장이 왔다. 은색벤츠를 탄 천사, 보바와 사촌누나, 그대들이 나의 첫 번째 ‘러시아 선입견 파괴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깡촌 골목길에서 만난 영어하는 천사 마리야
러시아-북한-중국의 국경이 마주한 도시 하산에 가고 싶었지만 국경수비대의 경비가 삼엄하여 가장 근접한 마을인 ‘크라스키노’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영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구 3200명의 이 작은 깡촌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걷다가 유모차를 몰고 산책 중인 인상 좋은 러시아 아주머니 마리야와 신기하게도 세 번이나 마주쳤다.

감사하게도 마리야는 영어대화가 가능했다! 심지어 마리야는 청년 시절 오클랜드에서 4주간 어학 연수했던 추억이 있다며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마리야의 남편은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알고는 친히 자신의 차로 안중근 의사 및 11인 독립투사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마냥 차에서 기다려주며 거기서 또 도보거리로는 한참 떨어져있는 호텔까지 나를 데려다 준 천사들…… 한민족 독립투사들의 얼이 깃든 ‘12인 단지동맹비’는 크라스키노에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였지만 구글 지도에도 찍히지 않는 엄한 황무지 한가운데 위치한 곳이라 막막해하며 내심 포기하고 있던 찰나에 마리야와 남편이 등장하여 베푼 친절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웠는지…

크라스키노에서 가장 고지대인 하산장군 승전탑이 있는 안개가 자욱한 언덕 꼭대기에서는 피크닉 중이던 한 러시아 가족을 만났다.

과자와 음료를 먹고 있던 알리냐, 트비냐와 발례랴가 이 엄한 곳에 혼자 찾아온 외국인을 반가이 맞아주며 음료수, 러시아 초콜릿 바, 해바라기 씨와 피스타치오 간식을 두 주먹 가득 쥐어 내 주머니에 넣어줬다.

심지어 묵을 곳이 없으면 자기 집에 와서 자도 된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할 전화번호까지 쥐어줬다.
러시아여, 연해주여, 대륙이여…

우리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와 갈라놓을 수 없는 아프고 힘겹고 거칠지만 뜨겁고 진하고 정도 많은 그대는, 더 이상 내게 두렵고 무서운 Scary Planet 이 아닌 Lovely Planet 이 되었다오.

꽃보다 아름다운 러시아의 사람들을 꼭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그때까지 “샤슬리바!”(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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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두루
순한글 '두루'는 본명 임명현의 키위 이름 'Drew'의 또 다른 이름, 메시대학교 졸업, 리테일 매니저, 오클랜드 사랑의 교회 청년, 뉴질랜드 내 무슬림을 섬기는 FFF(Friends of Friends Fellowship)에서 활동하며, 중동과 아시아를 두루두루 여행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