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한지 117일째, 카스피해 연안의 가장 큰 도시인 라쉬트 (Rasht)에서 밤 12시 출발하는 만석 야간버스에 올랐다. 심야버스 이동은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수면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히치하이킹을 제외한다면).
그런데 이번 심야버스는 조금 의외였다. 버스내 중간중간에 설치된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서 이란의 코메디 시트콤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목적지인 테헤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시끄러운 볼륨의 비디오 상영이 멈추질 않았기 때문이다. 피스타치오를 까먹으며 껄껄 웃어대는 옆자리에 앉은 이란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된 배낭여행자의 필수 아이템, 수면안대와 귀마개를 꾸욱 눌러 착용하고 온 맘 다해 수면모드에 돌입을 시도해보았지만 내가 졌다. 옆자리 아저씨가 일년치 웃음을 참고 살아왔거나, 이란 코메디 프로는 5초마다 웃는 타이밍이 나오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새벽 4시쯤 가까스로 잠들어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옆자리의 아저씨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깨운다. 얼굴을 찌푸리며 수면마스크를 살짝 올리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목적지인 테헤란 아자디 버스터미날에 도착했다. 졸리고 억울했다.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심야버스들의 대결집 장소, 아자디 버스터미날. 새벽 5시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두 개의 배낭을 앞뒤로 짊어진 채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대체 어디에 가서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하고 있던 순간, 더욱 당황스런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아랫배의 써든 어텍 (sudden attack)…! 특별히 먹은것도 없는데 이상했다.
급격한 아랫배의 반란으로 인해 70리터 배낭의 허리벨트 버클마저 해제시킨 후 동서남북 급히 뛰어다니며 화장실 사인을 찾았다. 두리번 두리번… 아무리 둘러봐도 나의 배를 진정시켜줄 안식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다급하게 뛰어다니다가 결국 주변 식당에 들어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흠치며 “익스큐즈미~ 토일렛~!?” 을 외치자 직원이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저~멀리 어딘가를 가리키며 쭈욱 걸어가라고 한다.
점점 더 거세지는 내 아랫배 속의 폭풍으로 인해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땀방울도 굵어졌다. 이 거대한 터미날 광장에 공공화장실 찾는게 왜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드디어 눈앞에 화장실 건물이 포착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 입구를 향해 조심조심,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는데 또 한번 당황스러운 현실과 마주했다.
화장실 입구에 줄서서 대기중인 이란 아저씨, 청년, 노인, 어린이들 어림잡아 50여명…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외국인 여행자라는 신분으로 애처롭게 양해를 구하며 시민들의 동의하에 새치기를 시도해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50여 명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이란의 수도 한복판에서 지금껏 아름답게 진행되어온 나의 여정에 찐~하고 따끈~한 쉼표(?) 하나를 찍게 될 것이 자명했다.
사막에 사슴이 산다면 오아시스를 찾아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헤매었을까. 때마침 택시 한대가 앞에 멈춰섰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몸을 투척, 기사에게 다짜고짜 “토일렛~ 플리즈” 를 외쳤다.
이런 나의 긴급함을 알리가 없는 기사는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합승승객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출발을 지체하고 있었다.
아… 당신의 카시트를 위해서라면 지금 출발하는 게 현명할텐데요 아저씨… 불굴의 의지와 인내심을 발휘해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다보니 어느새 택시엔 이란 아저씨 두명이 더 타있었다.
나의 목적지는 오로지 화장실, 다른 두 아저씨들의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메흐라바드 공항, 절묘한 합승이었다.
공항 입구에 택시가 멈춰서자마자 나는 거스름돈 받기도 거절한 채 나를 구원해줄 안식처를 향해 마지막 처절한 발걸음을 옮겼고 끝내… 승리했다! 공항 화장실은 다행히도 줄이 없었고, 아슬아슬 조마조마했던 내 여행의 최대위기를 그렇게 한 고비 넘긴 것이다.
대사를 무사히 치르고 비로소 심신에 평화가 찾아왔다. 여전히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시내로 이동하기보다는 일단 공항에서 눈 붙일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심야버스에서 제대로 취하지 못한 수면과 대사를 치른 뒤 풀린 긴장감 탓에 어디엔가 등을 기대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마침 눈앞에 나타난 거룩한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공항 한켠에 위치한 무슬림들의 기도처소였다.
밖에서는 기도처소 실내가 보이지 않게 되어있었기에 나는 입구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신발을 벗고 기도처소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무슬림이 아닌 내가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수상하게 여겨 쫓겨나진 않을까?’
조심스레 입성한 공항의 기도처소 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란의 신실하고 부지런한 기도용사들을 만나지는 않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는데, 기도처소 안에 있는 열여섯 명의 성인 남성 모두는 한결같이 저마다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꿈나라에 가있었다.
곤히 잠든 기도처의 아저씨와 젊은 사내들. 잠들어 있는 이란 기도용사들 덕분에 나 또한 안심하고 누워 깊은 꿀잠을 누렸다.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으로 보이진 않고, 아마도 이 기도처소의 사찰집사님(?) 혹은 관리인 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딸랑거리는 종을 흔들며 서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9시가 넘었다.
하루에 다섯번 있는 기도시간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의 첫번째 기도는 이른 새벽에, 두번째 기도는 정오를 막 넘긴 시간에 드려지기 때문이다.
나야 무슬림이 아니기에 배낭을 짊어메고 조용히 기도처소를 빠져나왔지만, 이게 웬걸, 수면을 마친 모든 기도용사들이 기도는 생략하고 각자 다들 짐을 가지고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말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이란 친구들과 대화하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항에 있는 기도처소에서 몸을 눕히고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일이라고 한다.
대단히 엄숙하고 비장한 이슬람교도들의 모습만을 연상시키던 모스크와 기도처소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