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한가위를 생각하며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밤이 제법 깊었습니다. 그만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해야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책상에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창문 밖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상큼한 밤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다음 순간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아! 하고 신음처럼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보름달이었습니다. 날이 흐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여 그 뒤에 숨어있던 보름달이 조금 전 구름을 벗어나 그 환한 얼굴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 방 창문이 환해지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보름달이 구름을 벗어나 그 환한 빛으로 어둠을 밀어냈을 것입니다.

어느새 보름이구나 하며 나는 반가운 친구가 찾아온 양 밤하늘의 보름달을 한참이나 쳐다보았습니다. 색깔이 발그스레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히 빛이 나서 너무도 다정했던 할머니 얼굴을 생각나게 하는 달을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다음 달 보름이 추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지만 창문에 어른거리는 달빛 때문인지 잠은 더 멀리 도망가 버리고 머릿속으로는 누군가가 불려주는 동요가 들려왔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달 속에 계수 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누가 작사하였는지 누가 작곡하였는지도 모르는 전래동요지만 까마득한 옛날 어렸을 때 많이 부르고 많이 들었던 노래입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달을 향해 인공위성을 쏘아대고 달에 내렸다 온 사람까지 있는 요즘 세상에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이 동요의 노랫말을 믿지 않겠지만 나이 든 내 머릿속에서는 추석 때가 되면 그리고 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면 이 동요가 들립니다. 그리고 옛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다가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가 나오면 가슴이 무너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추석 때가 되면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을 드나들며 차례(茶禮)를 지내기 위한 음식을 준비하던 어머니 모습, 추석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차례상 앞에 모이면 엄숙한 목소리로 우리 형제들에게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모습, 이윽고 차례가 끝나면 차례상을 방 가운데로 옮겨 놓고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마음껏 배를 채우던 정겨운 모습이 떠오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추석과 같은 명절 때가 되면 못 견딜 정도로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제 친구 중 몇몇은 부모님 중 한 분이 살아 계십니다. 이제는 너무 노쇠하셔서 모시기가 너무 힘들어 고생이 많다고 하지만 그런 친구들이 부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프시고 노쇠하셨어도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살아만 계신다면 옆에 모시고 살아생전 못했던 효도를 다 하며 때로는 그 앞에서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 늙은 아들을 보고 빙그레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얘야 고맙다 하면서 내 손을 잡아줄 어머니의 고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가사가 나오면 지금도 제 가슴이 무너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달마다 보름달은 뜨고 해마다 추석은 다가오지만 추석이 되어도 찾아오는 자식들이 없어 외로움에 지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아예 자식이 없다면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겠지만 불과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자식들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명절 마저 부모를 찾지 않으면 그 부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기껏 찾아온 자식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빨리 가야 한다고 엉덩이를 들썩이면 그 부모가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시대가 가버리고 ‘양친부모 떼어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싶어 개탄스럽습니다.

양친부모 떼어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율이 OECD 회원국 평균(14.2%)의 3배 수준으로 압도적 1위라고 합니다. 평균(14.2%)의 3배면 40%가 넘습니다. 이 통계가 맞다면 우리나라 노인 중 거의 반 가까이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빈곤하게 된 이유의 대부분은 젊었을 때 노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 이제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회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애지중지 키웠던 자식들에게까지 따돌림당하는 현실을 보니 한가위의 달빛이 마무리 맑아도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하늘 높이 솟구친 아파트와 빌딩은 어느덧 우리 고국이 세계 10대 경제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고 으쓱거립니다. 백화점과 쇼핑몰에는 상품이 흘러넘치고 고급 음식점과 카페가 곳곳에 자리 잡은 화려한 거리는 유럽의 어느 멋진 거리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세계가 놀라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 뒤안길에는 의외로 소외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발전의 속도를 좀 늦추더라도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 건강을 잃은 사람들,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부모들, 이런 모든 사람을 돌아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둥실 추석 하늘에 뜬 보름달이 누구에게나 그 부드러운 빛을 보내주듯이 이번 추석엔 우리 모두가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찾아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이해인 수녀가 쓴 시(詩) ‘달빛 기도-한가위에’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에서 ‘집’은 가족이 같이 사는 곳입니다. 따라서 ‘집’은 가족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의 한가위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달이 됩니다.


이런 그리움으로 이번 추석에 가족을 만나면 하늘에 뜬 둥근달처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게’ 된다면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도 열릴 것입니다.

추석의 우리말인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가 합하여 만들어진 ‘커다란 가운데’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곧 돌아오는 올해 추석, 아니 ‘한가위’엔 우리 주변의 그늘진 곳과 소외된 곳에 있는 분들, 그리고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들이 ‘커다란 가운데’로 나오실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멋진 ‘한가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