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하나님

이름부터 특별한 탕부하나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풍겨오는 부정적, 어쩌면 퇴폐적 뉘앙스를 하나님께 적용한 주제넘음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나, 팀켈러의 설명을 접하자 이보더 더 좋은 이름이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Prodigal(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다) Father: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 주신 하나님, 사랑의 극치.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다.

이 책은 팀켈러가 남긴 저작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동시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준 책이다. 작가 자신이 책의 내용을 설교로 전했을 때 가장 격렬한 반응과 열매를 볼 수 있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던 책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이 기존의 생각 틀을 뒤집고 깨뜨리며, 그 신선함이 성경의 가르침을 과연 적시함에 있을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 보통 이야기의 초점은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두게 마련이다. 혹 조금 더 넓고 균형 잡힌, 다시 말해 훈련된 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음을 드물게 눈치채기도 한다.

그러나, 팀켈러는 놀랍게도 첫째 아들에게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시종일관 맏아들을 사용해 독자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그러나 유익하게 자극한다. 말씀 그대로다. 찌르고 쪼개며 그 사이로 성령님의 빛이 들어가게 만든다.

그는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 속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드러내 보이는데, 첫째는 ‘세리와 죄인’ 둘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첫째는 집 나간 둘째 아들과 맞닿아 있으며, 둘째는 집을 지킨 맏아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랬듯이 ‘죄인’인 동생에게 분노한다. 왜? 자기 죄를 둘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은 두 아들에게 사실 같은 죄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기독립성’과 ‘자기애’ ‘자기주장’이다. 단지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방법을 사용했고,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방법을 사용했다. 둘째 아들은 도덕적 비틀어짐이 있었고, 첫째에겐 감추어진 교만과 통제 욕구가 있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더 위험할까?

팀켈러는 첫째 아들이라고 말한다
죄의 질이 더 나쁘거나 양이 더 커서가 아니라, 불가시성, 즉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을 열어 동네가 다 알도록 ‘자기 것’을 아버지께 요구했지만, 그는 무언으로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태도이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한 이유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즉 하나님을 닮고 사랑하고 알고 즐거워하려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팀켈러는 두 아들 모두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말한다
책은 죄의 민낯, 감추어져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죄의 정체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규칙과 도덕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죄를 정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첫째 아들이 대표하는, 즉 도덕적인 일탈을 전혀 범하지 않은 사람도 부도덕하고 방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상태일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책 속에 맏아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차르트의 라이벌 살리에리의 기도이다.

“주여, 저를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하소서! 음악으로 주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고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사랑하는 하나님이여,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 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가 죽은 후에도 제 작품이 사랑받고 제 이름이 영원히 회자되게 하소서! 그 대가로 저는 주께 제 순결과 근면함과 가장 깊은 겸손과 삶 전체를 드리겠나이다. 또한 사람들을 최대한 돕겠나이다. 아멘, 또 아멘!”


살리에리는 찬송을 작곡하고, 순결하게 살며 선행에 힘쓰지만 모두 지극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맏아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알기도 원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잔치에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당시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불참한다는 것은 공연히 아버지를 욕보이는 일이었기에 맏아들은 얻어맞고 쫓겨나가거나, 심하면 모욕죄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다음 수순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을 찾아가셨고, 권하고 위로하시며 초청하신다. 둘째 아들을 기다리시고, 달려가 맞이한 것과 비교해 결코 작지 않은 사랑이다. 다시 말해,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았다.

“하나님은 탕부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백미는 팀켈러가 발견한 ‘진짜 형’에 대한 질문이다. 비유는 맏아들의 어떤 변화나 회개하고 잔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어색한 결말을 맺는다. 질문을 남겨두신 것이다. 누가 나의 진짜 형인가? 비유의 맏아들은 시기하고 욕심내고, 분노하며, 동생을 찍어 내버리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오시고, 대가를 치르신다.

진정한 형으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종말에 열릴 대잔치에 초청받았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그리고, 이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형을 만난다. 잔치에 손잡아 이끄신다. 차려진 온갖 아름다운 음식을 맛보라 하신다. 들어가니 거기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나같은 둘째, 나같은 첫째들이 즐비하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를 감사하며, 현재를 누리고, 미래를 소망한다.

“우리는 탕부하나님의 교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