謀事在人(모사재인) 成事在天(성사재천)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謀事在人(모사재인) 成事在天(성사재천)’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고자 도모하더라도 그것의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지극히 성경적인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에서 영성으로
한국에서 전형적인 샐러리맨으로 생활하던 나는 매사에 지극히 이성적으로 접근하였고 직장 및 사회생활도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는 자세로 준비해 왔지만 이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물론 영주권을 받아서 오기 때문에 기본적인 뉴질랜드 국가 차원의 복지 혜택은 누리겠지만 한국에서의 정년이 보장되고 전공을 살려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직장을 과감히 퇴직하고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Zero Base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직장과 사업 등을 통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고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태로 오클랜드에서 아내의 삶과 딸의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홀로아리랑(?) 신세가 된 셈이다.

출국 일자가 다가올수록 밀려드는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막연함에 앞서 가족에게는 말 못하는 불안감도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나 혼자라면야 세상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경력 단절된 아내와 나, 그리고 이제 아직 기저귀를 차고 이유식을 먹는 딸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갔지만 한 달 먼저 오클랜드로 간 후배에게서 이런 천국이 없다는 말에 현혹되어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싣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드디어 출국 일이 되어 우리 가족은 물론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전부 공항에 나왔고, 공항 출국장에 교회 지인 몇 분과 담당 교구장이 나와 공항에서 이민 환송 예배를 드렸는데 주신 성경 말씀이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여호수아 1:9)였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마음을 아시고 딱 맞는 말씀을 해 주셨는지 감동할 따름이었다. 유학을 위한 이민을 가자고 부추긴 내가 계획은 했지만 세부 실천 사항은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막연히 떠날 수밖에 없던 나에게 주신 이 말씀은 결국 유학 이민 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 식구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감사하게 만들었고 하나님 여호와가 늘 함께하실 것임을 굳게 믿게 만들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뉴질랜드
이렇게 무장 해제되어 말씀 한 구절 붙들고 출국하였으니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교회부터 찾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착하여 첫날 우리끼리 다시 가정예배를 시작하면서 감사 기도를 드렸지만 선배 이민자들의 경험을 귀동냥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한 달 먼저 도착한 후배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모텔에 방문하여 예배드려 주고 집을 구하고 차를 구매하는 등 본격적인 정착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고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이민 러시가 시작된 93년도부터 한동안 오클랜드 한국 교민 분위기는 이민 와서 처음 1~2년은 그냥 다양한 복지수당을 받거나 지참금을 쓰면서 즐기라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이 뉴질랜드 1달러가 한화 400원대였고 휘발유는 한국의 절반 가격 정도였으니 지금과는 비교 불가이다. 또한 교육비와 의료비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교육의 질도 전혀 나쁘지 않아 대부분 국공립학교에 다니고 소수 몇 가정만 사립학교에 다니는 정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비슷한 또래 가정들과 들로 해변으로 드라이브하며 허구한 날 피크닉 다녔고 도착 3일 만에 타카푸나 퍼블릭 골프장에서 머리를 올렸는데 그날 골프채 잡은 첫날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대략 난감이다.

그러면서 저녁에는 교회에서 모이는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장로교회를 다닌 나는 드럼은커녕 기타도 없던 조용하고 엄숙하며 손뼉도 잘 치지 않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전혀 다른 스타일 예배와 찬양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성령 세례를 받아 방언 기도를 해야 한다며 계속 안수해 주는 목사님, 복음성가에 북치고 일어서서 찬양하는 분위기에 아주 많이 낯설지만 거의 매일 이런 예배와 기도를 하다 보니 나도 성령 세례를 받고 조금씩 기도를 더해가며 뜨겁게 기도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경력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
그러나 이런 정착 생활 다음의 일은 직장을 구하는 일이었다. 슬슬 은행 잔고도 줄어들고 31살에 도착한 뉴질랜드에서 사업을 하기에는 경험과 자본도 없고 결국 직장을 구해야 했다. 한국에서 첨단 장비 엔지니어였던 나는 구할 직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민 사회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에 제일 큰 한정식 식당 지배인 자리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다행히 바로 직장이 생겼다. 한국에서 대학생 때 여러 알바도 해 봤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작은 규모의 수제비 전문집 관리도 해봤기에 일이 어렵진 않았다. 이렇게 뉴질랜드 최초 목적인 유학은 온데간데없이 돈부터 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부터 주일성수는 꼭 지킨다는 가정의 룰을 갖고 있었고 식당 지배인 일도 주일에는 영업을 안 했기 때문에 주일성수는 문제없었다. 다행히도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는 이민 초창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교인 수도 많아 주일마다 학교 강당과 교실을 임대하여 어른 예배와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당연히 우리는 어른 대예배를 드렸고 자녀들은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예배를 드렸다.


여기서부터 큰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일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도 갈까 말까 한 어린 나이라 무슨 비전을 갖고 있다거나 커서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개념도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비전을 품고 기도하니 현실이 되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 식구들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집에 돌아와서 큰딸이 갑자기 자기는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고 당차게 이야기하길래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니?”라고 물어보니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전도사님 설교가 끝나고 난 후 아프리카 어린이들이(어찌 보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도 있지 않았나 싶다) 굶고 병들어서 너무 마르거나 질병으로 사망에 이르는 동영상을 보았다고 했다. 어린 환아를 고치고 사랑으로 품는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의사가 되고자 하는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고 교회에 많은 부흥 강사가 오고 기도해 주실 때마다 “너는 꿈이 뭐냐?”라고 물어보면 주저없이 소아과의사가 되겠다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같이 기도를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 당시 기도는 구체적이지 못했고 막연히 “주님 염치없지만 가능하다면 의사 되게 해주세요.”라는 식의 소극적인 기도가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가 되는 길은 뉴질랜드나 한국이나 녹록하지 않았다. 오클랜드 대학의 경우 바이오메드 전공으로 입학하여 대학 1학년 성적과 의대 적성시험, 그리고 심층 면접 등의 시험 과정을 통과하여야 의대 본과로 진입하는데 교민 자녀는 매년 한두 명 정도, 많아야 5명 이내라고 하니 우리 부모 생각에 현실적으로 능력 밖의 일이라 사료되었다.

그렇다고 꿈을 접을 수는 없는 일, 그때부터 주님께 구체적으로 기도 제목 작성하고 ‘어찌해야 의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라고 주님께 문의를 하면서 진심으로 기도한 결과 20여 년이 넘은 지금 기도의 응답으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고 코로나 기간 동안 소아과 감염분과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는 등 초심과 기도가 평생을 좌우하고 결국 의사의 길을 가고 있음은 우리에게는 기도의 응답이요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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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길
연세대학교 졸업, 뉴질랜드 광림교회, 우리엔젯유학원 대표원장 / 대학진학 컨설턴트 / 교육칼럼니스트. 20여 년간 유학원을 운영하며 두 자녀를 모두 의과대학에 보내어 의사로 성장시키며 신앙과 교육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