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죄는 무엇일까?

저자 너새니얼 호손(미국, 1804-1864년)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청교도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 『주홍 글자』를 썼다. 청교도 시대는 죄(sin)도 범죄(crime)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이 소설은 불륜이란 죄를 다룬다. 이 작품은 막연하게 여겼던 인간의 내면에 묻혀 있는 죄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드러난 죄
등장인물 중 헤스터 프린이란 여인은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을 두고 불륜을 범했다. 그 죄 때문에 이 여인은 공개적으로 3시간 동안 처형대 위에 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뒤에 평생 주홍 글자 ‘A(Adultery)’를 가슴에 달고 다니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불륜 상대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은 죄
사람들은 한 남자가 스스로 이 주홍 글자(A)를 가슴에 붙이고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의 불륜 상대는 바로 같은 마을에 살았던 딤스데일 목사였다.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 중에 딤스데일 목사의 내면만 표현한다. 딤스테일 목사는 자신의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괴로워했다.


딤스데일 목사가 자신의 주홍 글자를 숨겼던 이유는 자신의 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자니 목회자로서 생명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또한 감추려고 하니 죄책감에 마음이 한없이 무너졌다. 목사는 자신을 ‘갈아탄 사람’,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은 사람’, ‘비열한 사람’, ‘역겨운 사람’으로 인식했다. 목사의 타고난 성품은 남달리 진실을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했다. 그런 그가 자기 죄를 숨기다 보니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딤스데일 목사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끝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며 일찍 죽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스스로 처형대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며 죄로부터 해방감과 올바른 일을 했다는 안도감으로 그 짧은 단 몇 분의 행복을 깨닫게 됐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어떤 삶을 사는 게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가끔 우린 오래 살아야지,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살아야지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만, 단 몇 분이라도 인간다운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대로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복수하는 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던 헤스터 프린의 남편인 의사 칠링워스는 딤스데일 목사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을 때, 그의 가슴을 헤치고 ‘주홍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목사가 헤스터 프린의 불륜 상대임을 확신하고 복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칠링워스는 목사의 약점을 가지고 마음을 콕콕 찔러 신경쇠약이 되도록 은밀하게 복수했다.


칠링워스는 처음엔 신사다웠다. 하지만 복수할 때는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딤스데일 목사의 마음을 허락도 없이 맘대로 드나든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지만 칠링워스는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처럼 행동한다.


작품 초반부에 등장한 헤스터 프린은 3시간 동안 대중 앞에 서서 공개 망신을 당했다. 얼마나 치욕적이었을까? 하지만 후반부엔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왜 그럴까? 헤스터는 불륜이란 죄를 지어 삶의 족쇄가 되었지만 죄인을 멀리하려는 청교도들 완고함 덕분에 헤스터 주변에는 2-3m 정도 거리의 원형 공간이 생겼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생긴 것이다. 오히려 헤스터 프린은 어디를 가든지 편안했다.

반면, 딤스데일 목사에게는 이런 안전지대가 없었다. 자신의 죄를 숨기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 괴로워했고 설상가상으로 칠링워스가 수시로 심리치료라는 명분으로 죄책감을 가중시키며 자신의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작가는 작품에서 죄를 분류하지 않고, 죄에 대해 느끼는 정도를 묘사했다. 하지만 청교도 사회는 죄를 다양하게 분류했다. 죄는 나쁜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곧바로 정죄했다. 감옥에 가둬두거나 모욕을 하거나 채찍질하거나 공개적으로 따돌림하거나.

진짜 죄는 무엇일까?
독자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진짜 죄는 무엇일까?’ 이 당시 청교도들이 사실 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것 같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죄를 이해하지 못했다. 청교도들 스스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더라면 헤스터 프린같은 죄인을 대하는 것이 다르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별반 너랑 차이가 없어,” “나도 죄인이야,”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다른 죄인을 품어줄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헤스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을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모두 사라졌다. 왜냐하면 자기도 죄가 있는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다. “너도 죄인이다!”


이 당시 청교도 신앙관은 무척 경직되었다. ‘나는 너랑 달라’라는 자신만이 의인이라는 생각은 남을 정죄하기 쉽고 그로인해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 그들의 죄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딤스데일 목사는 자기가 자기 죄를 해결해보려고 애쓰다가 뒤늦게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가져간다. 죄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넓어지면 세상이 확 트인다. 생각이 좁으면 소통이 안 되고 고립된다. 청교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닫혀 버렸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너랑 차원이 달라’라고 말할 뿐이다. 안타깝지만 ‘너는 죄인이지만 나는 여전히 의인이다’라는 생각 속에 갇혀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아니면 주변에서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자는 없는지, 청교도와 같은 자기만 의인이라는 생각에 갇힌 사람이 없는지, 남의 약점을 이용해 괴롭히는 자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먼저 죄인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은 기쁨을 나눠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긍휼과 용서가 가득한 교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품어주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혹은 나 자신은 서로에게 어떤 말을 주고받으며 사는지 생각해 보자.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말이 아니라 서로를 품어주고 용서하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예수의 정신,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