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다녀오면 늘 싸우는 부부가 있다고한다. 신랑에게 주는 권면은 아내가 듣고, 신부에게 주는 권면은 남편이 듣기 때문이다.
큐티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마치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말씀의 거울은 정확하게 나를 비추어 준다. 대부분의 성경은 저자와 독자가 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복음서이다. 그렇다고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번 글은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큐티, 즉 나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말씀 묵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
서울 강남에 있는 큰 교회를 섬길 때의 일이다. 남자 순장들의 모임에 갔다가 교수인 한 순장이 늘어놓는 자랑 아닌 자랑을 듣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한 소감을 얘기하면서 교회들은 쇠퇴하는 반면 무슬림 인구는 약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논리였다. 그의 박학다식함과 유창한 언변으로 인해 다원주의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었다.
젊은 목사인 나도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큐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였다. 베드로에게서 비겁했던 나의 모습이 보여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를 비추어 준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 마음의 상태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심을 느낄 때가 많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비롭고 놀랍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 되기 쉽지 않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며 자신에 대해선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서야 한다.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지나친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자기 객관화’를 이룰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교만하거나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세상의 기준으로 대하지 않으신다. 말씀 앞에 서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뵙게 된다. 때론 책망하시지만, 더 많은 위로와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주신다. 큐티하면 자존감이 회복되고, 겸손하고 당당한 사람이 된다.
나를 비추는 말씀의 거울
목회했던 교회의 한 교인으로부터 목사가 자기를 향해 표적 설교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과 괴리된 설교를 하지 않는다.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전한다.
어떤 면에선 모든 성도에게 표적 설교(?)를 하는 셈이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린다면 이것이 더 큰 문제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설교자를 통해 지금 나에게 하신다고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표적 설교의 대가셨다. 듣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지셨다. 세리와 창기에게는 회개를 촉구하시면서도 따뜻함을 겸비하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겐 외식하는 형식적 신앙에 대해 추상같이 책망하셨다. 말씀을 펼치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상으로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것이 큐티라고 할 수 있다.
큐티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는 말씀처럼 내 인생길을 정확하게 비춰 주신다. 말씀은 남의 발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다.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 수많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 생활하면 위험하다. 유튜브나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를 듣게 된다. 듣다가 지루하거나 귀에 거슬리면 채널을 돌린다. 너무 위태로운 일이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예배자의 한 사람으로 듣는 설교가 중요한 이유다. 큐티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시간에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큐티는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시간이다.
내가 들어야 하는 인격적인 말씀
큐티하면서 오늘 이 말씀은 김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너무 은혜가 되어서 그 집사도 묵상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면 얼마든지 좋은 일이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말씀을 묵상할 때 내 마음에 찔림을 받지 못하고, 김 집사가 생각나면 큐티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큐티는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고 생각해 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말씀으로 자기를 비추어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읽고 배우고 묵상한 말씀이 지식이 되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큐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흔히 빠지는 신앙의 함정이다.
6년 정도 이민 목회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말씀의 뿌리가 빈약한 성도들이 너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이민 와서 도움을 받기 위해 출석한 교회를 거듭남 없이 계속 다니다가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았지만 여전히 종교인으로 남아있는 안타까운 경우 말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들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원하신다. 인격적이라는 의미가 다양하지만,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큐티는 하나님의 인격의 결정체인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다. 그분 앞에 혼자 나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을 통해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고, 나는 깨달은 말씀을 기도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 큐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점점 인격적으로 변화된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게 되고,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서 삐뚤어지고 흉한 모습들이 조금씩 변화된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삶이 변화되고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 성도들은 큐티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큐티는 선택이 아니다. 신앙생활의 필수다. 다양한 형태의 큐티가 있겠지만, 매일 주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교제하는 시간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식적인 종교인이거나, 교회 내의 비신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4)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면 흉측한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이기적인 자기애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니다. 줄 세우는 세상 속에서 실패한 루저의 모습도 아니다. 명품을 걸치고 으스대는 졸부의 모습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온전한 신앙인격자의 모습이다. 큐티를 통해 이런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