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네이 코레 므?”

“헬로우? 하아 유?”


튀르키예(구. 터키)에서는 잘 들어볼 수 없는 영어가 어디선가 들려왔습니다.

12년 전 2012년 환갑을 앞둔 나이에 튀르키예의 수도, 5백만 인구가 사는 앙카라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아내와 아들 2명과 함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물어물어 5층 아파트 중 지상층에 방 3개짜리 렌트를 얻어 막 이삿짐을 들여놓는 순간이었습니다.


소리 나는 곳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파트 입구의 바로 위 2층 베란다에서 웬 튀르키예 노인이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내게 말하는 소리였습니다. 아직 튀르키예 말도 모르는 때라서 친숙한 영어가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튀르키예에서 군인으로 은퇴해서 이혼한 딸과 같이 부부가 살고 있는 네딤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밖을 내다보다가 웬 외국인이 이사를 들어오니 영어로 말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바로 윗집이라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영어로 소통이 되어 자주 들락거리며 ‘차이’(tea)도 얻어 마시고 곧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분은 40대의 이혼한 딸 ‘프나르’ (샘물이란 뜻)와 노부부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발에 깁스를 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딸은 40대였지만 일찍 결혼을 해서 이미 건장한 대학생 아들 1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운동을 거의 안 하고 잘 먹기만 해서 그런지 몸이 무척이나 뚱뚱한 상태였고 무슬림이 아닌 무신론자 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물정 잘 모르는 선교지, 8천 5백만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튀르키예의 낯선 외국에서 천사 같은 이웃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주}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잠언 16장 9절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IMF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다시 받고, 뉴질랜드 하나님의성회 신학교에 들어간 것, 선교 컨퍼런스에서 무슬림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던 것, 무슬림 국가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 튀르키예로 혼자 정탐 여행을 오게 된 것, 전혀 계획에도 없던 도시 앙카라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게 된 것, 대학교 설립 비전을 가지고 왔지만, 결국 하나님은 ‘원 클래스 원 스쿨’ (One class one school)을 통해 한 영혼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신 것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처음에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우리에게만 친절하게 잘 대해 주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고 튀르키예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아. 형제의 나라!”라고 반색을 합니다. 튀르키예가 한국전 참전 16개국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전에 “큐제이 코레 므? (북한입니까?) 규네이 코레 므? (남한입니까?)” 를 꼭 묻긴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한국에 관해서 뭔가 좀 안다고 약간 으스대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한 이유는 우선 이슬람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인들은 철저하게 <행위 구원>을 믿습니다. 즉, 24시간 ‘알라(하나님)’가 어디서든지 CCTV처럼 자신의 말과 행위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알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행 쪽(오른쪽)으로 기울면 천국으로, 악행 쪽(왼쪽)으로 기울면 지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걸 진짜 믿는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남에게 선행을 베풀며 살지 않을까요? 저 자신도 때때로 기독교인들도 이런 무슬림의 행위 부분은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또 한 가지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조상이 원래 양이나 소를 치는 유목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양들, 가축들만 보다가 게다가 지금처럼 모바일 폰도 없고, 사람하고는 말 한마디도 못 하다가 지나는 행인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그러다가 모닥불 앞에서 ‘차이’를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면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혹시 들으셨어요? 이웃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곧 이쪽으로 쳐들어온다고 합디다.”
“뭐라구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아마도 그 나그네가 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그냥 멋모르고 거기 있다가 자기 양 떼를 모두 뺏기고 자신도 죽임을 당했겠지요. 이러한 연유들이 전통이 되어 튀르키예 무슬림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결국 이 친절한 튀르키예 무슬림 8천 5백만 명 대부분과 전 세계 인구 4명 중 1명꼴인 17억 명 무슬림들 중 구원받아 천국에 갈 자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튀르키예 무슬림들에게 “예수님 믿으시나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저는 당연히 “하이으르! (아니오!)” 라고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십중팔구 “에벳! (예!)”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또다시 물어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과 모하멧 같은 수많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과도 다른 잘못된 믿음이지요.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합니다. ‘꾸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 대신 그와 비슷한 사람이 죽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우긴다는 것입니다. 역시 잘못된 믿음이지요.


성경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구원의 길을 분명히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흠정역)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을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슬람교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도 않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대놓고 거부합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이슬람교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구원의 종교가 아닌, 영혼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종교라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집니다. 한편 지금 튀르키예는 그야말로 K(한국: ‘코레 Kore’) 자만 앞에 들어가도 통할 정도로 한류 바람이 뜨겁습니다.

8년 전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저희 ‘앙카라 사역 센터’(5층 아파트 중 지상층, 현대식 방 4개, 약 80평)는 앙카라 시내, 즉 오클랜드의 퀸스리트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 이 ‘앙카라 사역 센터’는 매 주일 튀르키예 일케르 목사께서 갈라디아교회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매주 월요일은 튀르키예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D3 제자 훈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센터 문 앞에 슈퍼마켓이 3개나 있고, 사통팔달 시내 중심부가 걸어서 7-8분 거리면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집 근처에 있는 코렐리( ‘한국 이씨’ 란 뜻) 한국 식당은 메뉴가 대부분 한국의 포장마차 메뉴인 떡볶이, 김밥, 비빔밥 정도입니다. 그런데 보통 때에도 튀르키예 젊은이들이 한국 식당에 입장하기 위해 식당 밖 길에까지 줄을 길게 늘어선 것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번은 한국 식당 안에서 식사하는 튀르키예 젊은이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거의 대부분 튀르키예 사람들인데 한국 사람들처럼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튀르키예 사람들은 빵이 주식이기 때문에 포크와 나이프를 주로 사용하는데 말입니다.

지금 튀르키예에서는 한류 바람과 K-팝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튀르키예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형제 국가라고 친절을 베풉니다.

이렇게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좋은 기회가 언제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그 튀르키예 사람들과 친교를 통해 사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할 적기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내 죄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증거해야 할 이웃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요?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에베소서 2장 8절. 흠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