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는 신앙 공동체

토요 모임: 대화를 통한 신앙 공동체로의 변화
요즈음 밀알에서는 말씀 나눔 시간에 장애인과 봉사자들이 그룹을 나누어 대화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모인 이들 중에는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어 이러한 다양한 차이가 있는 그룹 안에서 대화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속한 그룹의 장애인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둥글게 둘러앉아 자기에게 집중하여 두세 번 질문하면 마치 야단맞는 것같이 느끼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소침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을 잡아주고 여러 표현으로 질문하며 기다려주고 전심으로 들으려 노력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는 장애인을 볼 때 봉사자들이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해왔던 개입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줄곧 앉아서 일방적인 설교를 듣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밀알 토요 모임의 목적인 신앙 안에서 사회적 교제를 연습하는 좋은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나눔을 대화로 바꾸어 보게 된 데는 기독교 공동체 이야기를 해주신 기독교 교육의 한 ‘할아버지’의 영향이 큽니다. 20세기 기독교 교육학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웨스트호프 3세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그분의 글은 늘 책상머리에 꽂아두고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웨스트호프 3세의 가르침: 공동체를 통한 신앙 교육
그 할아버지의 글을 읽을 때는 한창 주일학교가 양적으로 성장하던 시절이었고, 성장과 성공이 미덕이었습니다. 빠르게 기독교 교리를 전수하고 학교처럼 지식을 전달하던 교회 학교 교육 방식은 지적 능력과 생산성 가능성이 높은 계층을 선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생산성이 낮은 계층이나 연약한 이들은 교회에서 소외되곤 했습니다. 교회학교의 성경 암송, 성경 경시대회 등은 기독교 지식인을 양산했으나, 따뜻한 신앙인들은 양산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가 되었음에도 이전보다 위선적이고 지능적이며 정교한 범죄들은 더 많아졌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할아버지는 참된 신앙은 지식과 율법을 전달하는 학교식 지식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는 어떤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통한 기독교 문화화, 기독교 사회화를 통한 교육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천해 보는 말씀 나눔이 이러한 사회적인 소통을 통해 공동체의 신앙이 장애인들에게 전수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대화하는 공동체가 가져온 변화: 이해와 친밀감 증진
문화화와 사회화는 교회학교처럼 정해진 교재와 커리큘럼이 없습니다. 그 공동체의 분위기와 공동체가 가진 정신을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무시나 동정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전에 썼듯이, 봉사하는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 ‘누구 씨, 형, 오빠, 언니’라는 가족 호칭이 자연스럽게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학교가 아닌 함께 사는 기독교 공동체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그룹에서 대화를 하며 장애인을 판단하는 단계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화하지 않을 때는 상대를 대상화하고 우리의 지식으로 판단하며, 우리의 생각대로 그들의 필요를 추정하고 무언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시한 대로 따르지 않으면 조금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장애인이 표현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더 알고 싶어지고, 한 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더 가지게 됩니다. 말씀 나눔을 대화로 바꾸고 나서 봉사자와의 친밀도가 더 깊어지는 것을 봅니다.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의 신앙 전수 방식 비교
대화하는 공동체의 분위기가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장애인에게 신앙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웨스트호프 3세 할아버지의 안내대로 성경과 현재의 삶을 동시에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있는데 현대 교회 공동체의 삶에는 없는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두 교회 공동체에는 공통적으로 복음 전도, 예배와 찬양과 가르침,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봉사, 그리고 함께 먹고 교제하는 같은 동질 그룹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반면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의 차이는 회심을 인정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집단 회심을 인정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가족이 모두 기독교로 바뀐 것이 그 유명한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배경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가족이 모두 예수를 믿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바울과 실라는 그 집안 모두에게 세례를 줍니다. 아이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 가족의 아이들이나 디모데처럼 기독교 가정 공동체의 집단적 회심을 인정하고 아이들은 기독교 가정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자랐습니다.

대조적으로 현대 교회는 개인의 인격적인 만남과 개인의 결단을 중요시합니다. 특히 1900년대 부흥 운동의 결과로 비록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더라도 신앙의 전수가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개인적인 사람들이 모인 군중은 있지만 공동체가 가지는 신앙의 전수 기능은 교회 안에서 간과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웃지 못할 우스갯말 중에 ‘모태 신앙은 못 해 신앙’이라는 말이 부흥 집회 강단에서 공공연히 선포되고, 스스로도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현대 기독교는 체계적인 공부를 통해 신앙의 영역을 지적, 정적, 의지적 결단으로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방법으로는 1대1 제자 도제식 신앙 전수 교육이 되었습니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대학생들과 공부가 제일 쉬웠던 고학력자들에게 이런 제자화 교육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급속도로 고학력 고품질 교회를 추구하며 동질 집단별로 소그룹을 형성하여 모이는 교회가 선호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과 제자화 공부한 사람들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계급 차이 극복 노력
사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학력, 신분, 남녀노소 차이 없이 교회 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가 항상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 묘사된 초대 교회 안에서도 계급과 신분, 경제적인 차별 등이 존재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반면 교사의 배움을 줍니다.

사회적, 경제적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는 고린도교회의 애찬의 폐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1장 성찬식 제정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인과 노예 등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애찬은 각자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부유한 성도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가져와 자기들끼리 먼저 먹고 심지어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가난한 성도들은 음식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거나 주인을 섬기다가 늦게 도착하여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픔을 겪는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성경은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실제적인 권면을 해 줍니다(고전 11:33-34).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3절): 애찬 시 부자들이 먼저 먹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성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서로 기다려 줄 것을 명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연합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핵심적인 권면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리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34절): 이 권면은 부자들끼리 음식을 많이 싸 와서 자기 그룹끼리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며, 못 가져온 가난한 이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말라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성찬 제정 말씀에 애찬의 권면이 붙어 있는 것은 애찬과 성찬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신앙 교육의 기회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언급하는 성찬과 애찬은 공동체의 신앙 문화적 사회적 행위이며, 그 안에 신분과 계급의 차별을 해소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 신앙 교육의 장입니다.

공동체 신앙과 하나님의 나라
이러한 초대 교회의 계급과 사회적 신분 차이의 극복은 한 사람의 지적, 정적, 의지적 결단이나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일원들이 신분, 계급 차이를 넘어 대화를 통해 공동체의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개인의 결단과 변화로만 성경에서 원하는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고, 신앙의 전수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나라에서 성경의 신앙이 온전히 전승되려면 기독교인이 속한 공동체가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웨스트호프 3세 할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신앙 공동체 교회 이야기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회심한 개인의 집단이나 제자화된 그룹화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될 때 신앙적인 영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바실레이아 데오(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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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충성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 기독교교육 대학교 석사 졸업. 밀알선교단장. PCK선교사. 장애인 토요학교, 연합주간센터 (UNITED CROSS CULTURAL COMMNUNITY CENTRE, 치매 어르신 주간센터, 주바라기 사랑방)를 운영하며, 인생에서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