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가졌던 무기는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양을 노리는 곰이나 늑대를 쫓아내는 ‘무릿매와 돌’이었습니다. 다윗은 기술자들이 개발한 첨단 무기로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이 준 투구와 갑옷과 칼을 거절했습니다. 그저 시냇가에 쓸모없이 나뒹굴고 있던 돌 다섯을 취했습니다. 그 조차도 하나만을 사용했을 뿐입니다(삼상 17:40).
영원전부터 예비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가지셨지만, 오히려 겸손하게 낮아지셨습니다. 이 땅에서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정한 거처도 없이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눅 9:58).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시는 희생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이방인 선교의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행 9:15). 지중해 연안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지원하는 조직이 있어서 큰 예산을 지원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고전 12:5-10).
그런데 요즘 교회를 개척할 때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금력이 있어야 교회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입니다. 쉬는 시간에 클라스에서 함께 공부하던 목사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한 목사님이 “전도사님은 무슨 사역을 하실거예요?” 물었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서 교회개척의 마음을 주신 상태여서 ‘교회개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돈이 많으신가봐요?”
저는 한국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에서는 본교회에서 개척을 위해 거액의 기초자금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수십 명의 핵심 일꾼들을 붙여서 교회를 거하게 차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이 50십이 넘어서 무작정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니 그분 생각에는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까요? 천지분간 못하는 철없는 사람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힘과 물량에 의지하는 지배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홈리스 사역을 시작할 때 든든한 자금력과 인력을 등에 업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인적 물적으로 제로 베이스(Zero Base)였습니다. 철저하게 약하디 약하고, 부족하고 부족한 가운데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클랜드와 런던에서 각각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두 아이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서 홈리스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음식도 주일아침에 집에서 손수 준비한 한국식 토스트, 소시지 롤, 커피 단 세가지였습니다. 집기라고는 중고로 구입한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당시에 이 사역을 시작은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한 주 한 주 주님의 은혜로 감당해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흔히 하듯이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사역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귀찮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참여해 달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잠잠히 지켜보고 계셨고, 필요할 때마다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학생수당을 받기 위해 공부하러 갔던 컴퓨터 클래스에서 만난 자매님이 딸과 함께 봉사에 참여했습니다. 기도회에 함께 하던 권사님이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악기레슨을 하는 집사님이 학생들을 이끌고 홈리스 크리스마스행사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홈리스 봉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참여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다 선교적인 관점으로 사역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나도 평범한 이민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한인사회를 향해 봉사 참여를 권하는 글을 한인사이트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약하고, 없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고, 미처 상상하지 못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무교, 심지어 카톨릭,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를 가진 분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프라이머리 꼬마 학생들로부터 컬리지 학생, 대학생 그리고 일흔이 넘으신 장로님 권사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또 학생, 전업주부, 직장인, 자영업자, 사업가, 변호사, 한의사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들은 모두 전도 대상자였습니다.
또한 단순히 음식을 나누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홈리스 형제자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유러피언, 마오리, 피지, 사모아, 통가 등의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는 신앙공동체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겸손과 약함으로부터의 선교 모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지만, 이것이 복이 되었습니다.
“약함으로부터의 선교”라는 말은 원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주제를 연구한 정용갑 목사는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으로 박사(Ph.D.) 학위를 받을 때 논문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이론을 보다 심화시키고 체계화했습니다(정용갑 2009:26).
“약함으로부터의 선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큰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해 때때로 부족하고,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선교의 도구로 택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이런 자세로 행하는 선교가 약함으로부터의 선교입니다. 이와 같이 약함으로부터 성취된 선교의 모델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선교입니다”(정용갑 2009:29).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원래 계획하시고, 보여주신 선교는 “약함으로부터의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힘과 물량을 앞세우는 지배적인 선교를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배적 선교는 선교의 탈을 쓴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이익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결과를 자신의 자랑으로 삼는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선교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1970, 80년대 한국교회는 소위 깃발만 꽂으면 교회가 부흥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 부흥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교회가 위축되고 쪼그라들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단계를 넘어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 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속에는 여전히 번영주의에 근거한 지배적 선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비참한 교회 현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큰 교회, 큰 건물의 망상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사이비 이단들은 활개를 치고, 교회는 서서히 기초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유럽교회와 미국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화려한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것에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며 좋은 관계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목장모임으로 교회로 초대하고, 마침내 주 안에서 머리 되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약함으로부터의 선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