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피 배달부

“커피 배달 왔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2021년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막 마쳤을 때이다. 딩동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현관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델타 코로나 발발로 두 달 전에 우리가 사는 도시 오클랜드에 록다운(lockdown)이 선포된 뒤로는 남의 집 방문이 금해졌기에 아무도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전에 규제가 조금 풀려 바깥에서는 두 가족이 마스크를 쓰고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아직도 집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누굴까, 아이들이 장난으로 눌렀나?’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현관을 향했다.

“Who is it(누구세요)?”라고 내가 현관문 앞에서 큰소리로 묻자 밖에서 인기척이 나며 “커피 배달 왔습니다,”하고 우리말로 답하는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설마 하면서 내가 문을 열자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D가 서 있었다.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위의 두 눈은 함빡 웃고 있었고 두 손은 소중한 보물인 양 커피 두 잔을 가슴 가까이 받쳐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근처에 왔다가 두 분 생각나서 들렸어요,”하며 그녀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마침 카페에서 테이크어웨이(takeaway)로 커피를 살 수 있기에 두 잔 사 왔어요. 식기 전에 드세요. 카페 커피 잡순 지도 오래되셨지요?” 하면서 그녀는 커피잔을 내게 내밀었다.

“누구예요, 여보?”하면서 부엌에 있던 아내가 궁금에 못 이겨 물었다. “D가 왔어, 여보. D가 커피 사 갖고 우릴 보러 왔어요.”라고 내가 답하자 아내는 깜짝 놀라며 “어머, 세상에. 그런데 어떡하지요, 들어올 수도 없고.”하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며칠 전부터 두 가족까지는 바깥에서 만날 수 있고 정원이나 뒤뜰도 바깥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D에게 말했다. “옆으로 돌아서 뒤뜰로 와요. 거기서 만나는 것은 괜찮으니까 잠깐이라도 있다 가요. 집사람이 보고 싶어 하니까.” 그러자 그녀도 환하게 웃으며 “아참,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뒤뜰로 갖고 갈게요.”하며 커피잔을 가슴에 안고 조심스레 돌아섰다.

봄꽃보다 아름다운 두 여인
나와 아내는 뒷문으로 나가 뒤뜰 데크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정리했다. “안녕하세요.”하며 D가 다가왔고 아내는 뛸 듯이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두 여인의 모습은 뒤뜰에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꽃보다 아름다웠다.


“아니 요즘 세 남자 뒷바라지하기도 바쁠 텐데 어떻게 우리까지 챙기느라고 여기까지 왔어요?” 하면서 아내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록다운 사태로 누구나 힘들지만 가족 모두가 집에만 머물기에 삼시로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주부의 손길은 너무도 바쁘다. 더구나 아들만 둘인 D는 요즘 같은 록다운에는 삼시로 세 남자 밥시중하기만도 보통 힘들지 않을 것이다.

D와 D의 남편은 우리가 가장 아끼는 후배 부부이다.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 사귀는 일이지만 D 부부와는 어언 이십 년이 넘도록 가깝게 지내고 있다. 나이 차이는 십 년도 더 나지만 형제처럼 가까이 지나기에 자칫 외로워지기 쉬운 외국 생활에서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고 있다.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록다운 중에도 때때로 안부를 묻는 전화를 잊지 않아 그때마다 고마웠는데 오늘은 아침 일찍 커피를 사 들고 찾아왔으니 반갑기 그지없다.

D의 남편은 오클랜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집안일하랴 두 아들 뒷바라지하랴 그리고 틈나는 대로 남편 사무실에 나가 도와주랴 D는 아마도 오클랜드에서 가장 바쁜 여자일 것이다. 그렇게 바쁜 여자가 월요일 아침에 근처에 온 김에 우리 생각이나 들렸다고 둘러대지만 우리 부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록다운의 제재가 조금 가벼워졌으니 바쁜 일 제쳐 놓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커피를 사 들고 우리에게 온 것이 뻔했다. “애 아빠가 요즘 너무 바빠서 같이 못 왔어요. 록다운 풀리면 맛있는 것 사드린다고 벼르고 있으니 양해해주세요.”라고 말하며 D는 가져온 커피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식기 전에 드세요. 두 분이 잘 가시는 Y 카페에서 사 왔어요.”

커피보다 더 뜨거운 무엇
그녀가 내미는 커피잔을 받아 들며 우리 부부는 그만 말을 잃었다. 아직도 따뜻한 커피잔의 온기보다 더 따뜻한 그녀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의 발발로 인하여 생전 처음 겪는 록다운을 살아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세상, 산책길에 사람을 만나면 반기기는커녕 서로 외면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는 세상. 이런 각박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참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은 바로 D와 같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넘겨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커피보다 더 뜨거운 무엇인가가 가슴 속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D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요일 아침이 특히 바쁘리라 생각되어 우리는 그녀를 더 오래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며 그녀는 떠났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직도 온기가 남은 커피잔을 감싸 쥐며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부부가 느끼는 감정은 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받은 사랑을 우리는 누구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인가?’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록다운 아래에서의 하루하루는 단조롭고 권태로웠다. 그러나 그 아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피 배달부를 맞았던 그날 하루, 우리 부부의 입가엔 종일 미소가 흘러넘쳤고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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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