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장로교 북섬에서의 역사

뉴질랜드의 장로교회역사의 이해를 돕고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를 먼저 간략하게 소개한다.

월터 링글(Walter L. Lingle)의 책 ‘장로교회, 그들의 신앙과 역사-Presbyterians, Their History and Beliefs’에 보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해외에 있는 장로교회의 어머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지 교회들은 존 낙스에 의해 세워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 교회인 것이다. 칼빈에게 직접 장로주의를 배운 낙스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점에서 칼빈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뉴질랜드 장로교회 역시 호주와 비슷하게 분열과 합동을 반복했다. 1901년 드디어 하나로 통합해서 뉴질랜드 장로교회를 만들고 더니든에 낙스 대학을 세웠다. 국가가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금하자 이 밖에 기독교 관련 대학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최초의 분열은 1733년에 에벤저 어킨스의 지도아래 ‘성직 추천령’(1712년 의회에서 통과된 이 법은 소수의 재산 소유자에게 교회의 목사를 임명하는 권리를 준다고 하는 법 – 이 법은 대의제를 취하는 장로교회는 큰 타격이었고, 이후 130년간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의 원인이었다)에 항의해서 일어났다.

1843년에는 토마스 찰머스가 472명의 목사들과 함께 나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분열(Great Disruption)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마침내 187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성직 추천령을 폐기 시켰고 교회는 자치의 힘을 회복했다.

웰링턴에서 시작된 뉴질랜드 장로교회
스코틀랜드에서 파송한 존 맥팔란 목사가 1840년 2월 20일 웰링턴 하버 Port Nicholson에 도착해서 첫 예배를 드리므로 뉴질랜드 장로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1844년 1월 7일에 예배당이 세워져 그곳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까지 4년 동안 선상에서 예배를 드렸다.

현재는 세인트 앤드류 교회(30 The Terrace)로 이름이 바뀐 이 건물은 1923년에 새로 지어져 뉴질랜드 정부 문화재 카테고리 1 로 지정되어 옆에 들어선 큰 빌딩 사이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로 서있다. 안에 들어서면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과 높은 천정은 한때 이 땅에 융성했던 기독교 부흥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이들은 스코틀랜드 모교회의 대분열의 여파로 뉴질랜드에서 내부분열이 생겨 1851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분리 독립해서 새로 세운교회)에 목회자를 요청하고, 1853년 도착한 존 모아 목사에 의해서 뉴질랜드 두 번째 장로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의 세인트 존 교회(윌리 스트리트와 딕슨 스트리트 코너)이다.


오클랜드의 장로교회
오클랜드에서는 1842년 첫 예배를 드렸다. 오클랜드 역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분열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 1847년 목회자를 요청해서, 1849년 도착한 G. A. 팬턴 목사를 통해서 세인트 앤드류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짧은 목회를 하게 되고 후임으로 데이빗 부르스 목사가 도착했다.

북지방 장로교회
와이푸(Waipu-오클랜드에서 121Km 쯤의 팡가레이 가는 길 동쪽 해변가에 있다)에 대를 이어서 뉴질랜드 장로교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룹이 도착했는데, 그들은 게일릭이라는 스코티시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집시처럼 산 위에 모여 사는 산족인 하이랜더(오타고 럭비팀 이름)족이 도착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74세의 로먼 맥클라우드 목사의 인도아래 Nova Scotia(캐나다)에 잠깐 들렸다가 1851년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Hawke’s bay 지역 장로교회
피터 바클레이 목사에 의해서 1859년 세인트 폴 교회가 네이피어에 세워졌다.

Taranaki 지역 장로교회
1860년 존 톰 목사에 의해서 뉴프리머스 교회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