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한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고, 세계 곳곳의 센터 교회들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감당하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고, 이민자와 현지인을 연결하고, 현세와 영생을 연결하는 브리지 교회,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는 교회를 꿈꾸었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적응하지 못한 이들의 아픔과 눈물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아픔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삶의 트랜스퍼 과정에서 어두운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생의 루틴을 허물고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 나가는 과정은 천 길 낭떠러지는 추락과 공허, 그리고 희망과 기대의 반복이었다.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던 어느 날, 말씀 한마디로 결박이 풀리기 시작했고, 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고통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의 무게에 허덕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성경 구절 중의 하나는 마 11:28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특히 30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찌 쉽고 가볍단 말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대속물로 희생하는 일은 지독하게 무거웠고 버거웠다.
내 딸아이는 목회자들과 선교사 자녀들을 돕는 MKPK 사역을 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중의 하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이구동성으로 ‘저는 무엇을 도와 드려야 하나요? 피아노를 칠까요? 의자를 정리할까요” 안내를 해야 하나요?’…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심리 속에는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무어라도 해야 하고, 무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심리 기재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목회자들은 일 안 하고 그냥 있으면 죄짓는 것 같고,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이유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바치고, 24시간을 일하고, 공황장애가 오고 죽을 것 같아도, 멈추면 잘못하고 있는 것 같고 죄짓고 있는 것 같은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마인드가 자녀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다.
나 또한 목회 내내 그런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이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하지만 빈손 빈 마음이 된 후, 어느 날 말씀 묵상을 하다가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살면 쉽고 가벼울 수 있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근원적인 결박에서 풀려나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으로 판정받은 의인들은 당황했다. “주여 내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으며, 목마른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자 악인으로 판정된 사람들이 따져 물었다. “우리가 언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드리지 않았나이까? 4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예수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하나님께 속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 말씀이 나의 멍에와 무거운 짐을 쉽고 가볍게 풀어주었다.
삶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다
이전에는 큰일, 좋은 결과, 많은 것을 남기는 일에 온 힘을 썼다. 그래서 항상 불만족했고 무언가에 눌려 있었다. 하지만 삶이 작은 자 하나를 돌보는 삶으로 트랜스퍼 하고 나니 보는 눈이 달라졌고 무게감이 달라졌다.
공동체보다는 한 개인이, 잘 나가고 있는 사람보다는 힘에 겨워 비틀거리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들에 만족함을 누리는 소확행에 눈뜨기 시작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 하지 않아도, 주머니 속에 잔고가 미미해도 그냥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적응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100살 이상을 살고 계신 김형석 교수는 인생을 3시기로 구분했다. 30살까지는 공부하는 시기, 65살까지는 일하는 시기, 90살까지는 한 사회인으로서 열매 맺는 시기, 그리고 그 다음은 유지하는 시기로 보았다. 60-90까지를 열매 맺는 황금기로 보고 있다.
인생 황금기에 내면의 질서를 세워갈 수 있는 척도를 발견한 것은 축복이다. 정체성이 정립되었고, 가야 할 방향이 잡히는 내면의 질서가 생기니 나이 듦에 대한 초조함이나 결과에 대한 조급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다스려지고 있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들이 놀이가 되고, 일이 되고, 사명이 되고 있다.
숙제 풀기 시작하다
눈을 떠보니 나의 가장 작은 자는 홀로 계신 어머님이셨다. 이 숙제부터 풀기로 했다. 23년간 이민자로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을 돌보지 못했다. 그 세월 동안 아버님과 장인 장모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님 홀로 남으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2달 일정으로 아무 계획없이 그냥 오롯이 어머님과 살기 위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아침에 눈 뜨면 안부 드리고, 함께 텃밭 가꾸고, 맛집 찾아서 외식하고, 카페 순례하고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처음 3주간은 자꾸 눈물 흘리시더니 이제는 매일 웃으신다.
주일날 함께 예배드리며 천국 소망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심리학자 박성웅 교수는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한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정체성을 찾고 나니 향후 10-20년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단하게 된다. 그래서 나머지 삶이 기대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