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차별은 어디서 시작하고 있을까?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분리하고 배척하면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동시에 스스로의 삶 역시 고립되고 마는 차별의 고리는 우리 인간 어느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
굳이 인문학적 기원을 쫓아 먼 인류사의 여정을 떠나지 않더라도 우리 인류가 보이는 서로에 대한 차별과 배척의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시간에도 만연하다.
그중 우린 한국민에게는 아주 특별한 타인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 내가 속해 있고 내가 인정한 나의 공동체와 그 외적 세상에 대한 명확한 분리 인식은 우리 자신을 쉽게 우리의 공동체로 인정된 이들과 그 외부로 구분 짓곤 한다.
전자에게는 누구보다 헌신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끼리끼리 문화라고 말한다.
기독교 문화 인류학자 히버트 (Paul Hiebert)는 우리와 같은 이러한 민족성을 너무도 정확히 집어내며 소작농 월드 뷰(peasant world view)라 구분 짓고 있다.
전통적으로 씨족 혹은 작은 부족 단위로 구성된 삶의 터전은 그 구성원이 그들 공동체 공통의 관념과 이해를 함께 공유하면서 생기는 연대감을 통해 종교적, 사회적으로 제도화된다. 히버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 동일한 가치를 나누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이 반대로 크게 작용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가 클 때는 2002년 월드컵에서처럼 국가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작은 교회 하나도 서로의 다름을 이유로 다른 교회와 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마는 우리 한국인의 타인에 대한 인식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반영된 우리의 민족적 문화와 전통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물론 우리 한국민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기초가 되어 삶의 곳곳에서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동의한 그 민족적 인식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생활 속에서 작동하며 우리 복음을 타인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어느 한 사회 혹 작게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집단이 동의하는 공통의 가치와 이념을 중심으로 서로가 나누어져 있다면 이 과정 속에서 받아들인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어쩌면 이와 같은 민족적 배타성을 내재한 채 그 신앙의 공동체를 성장시켜 오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는 문화 또는 옳다고 정의해 버린 관념은 자주 복음의 꼭대기에 자리해 다시 그 껍질을 두껍게 하면서 그 중심에서 빛나고 있어야 할 복음의 정신을 가리고 만다. 복음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문화와 우리 것이 너무 좋고 옳아 다른 누군가를 프레임 속에 가두어 배척하는 관습은 지금 우리 교회 주변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주변에서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종교적 독선이 삶으로 잘 드러나 보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그들의 가르침을 묶은 미쉬나*를 통해 자주 목격되곤 한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께서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요한복음 4장을 통해서 배척의 땅 사마리아에 대한 그리스도의 직접적 관여와 포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이혼권과 경제권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던 고대 근동에서 한 여인이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견뎌내야만 했던 모든 순간의 기구함이 차별의 땅 사마리아에서 이어지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조용히 그 여인 앞에 다가서신다.
출애굽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제는 배척과 차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경멸만이 남아 버린 그들의 관계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그 땅 가장 낮은 곳에 신음하며 이어가던 생명을 만나고 계신 것이다.
더 이상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도 이스라엘 공통의 정체성을 나누지 못하게 된 이방의 사마리아를 향한 그리스도의 발걸음은 그렇기에 언제나 그가 속한 유대 공동체로부터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주류사회의 목소리가 그를 막아선다 할지라도 낮은 곳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나 속해야 하고 인정해야 하는 사회의 관념 속에서도 인간 예수가 제시한 삶의 방향은 세상의 그것과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두 사회의 적대감 속에서도 그것에 바탕을 둔 배제와 차별은 결코 그의 것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작 우리가 미워하고 맞서 투쟁해야 할 우리 안의 죄는 덮어 버리고 엉뚱한 누군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 시대가 그리고 하나의 문화가 정죄하고 있는 집단적 차별은 그 문화와 시대를 벗어났을 때 그 누명이 벗겨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을 그 집단의 관념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며 차별의 땅 사마리아 그 우물가에서 만난 상처받은 여인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신약학자 카슨(D. A. Carson)은 이 장면을 통해 “새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한다. 모든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배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복음의 전통은 각 민족의 지리적 시대적 배경으로 재탄생 된 후에야 이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 그리스도인인 너희는 어디로 떠날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만날 것이며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걸어갔던 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의 길인가?”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사마리아 땅을 찾아 새로운 길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차별받고 배척받는 곳, 우리 믿음의 그릇된 표현으로 또 그 믿음의 전통으로 인해 가로막혀 버린 곳, 이 시대의 사마리아 땅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열린 복음의 자유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극단적 언어는 우리의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내세워 타인을 억압하는 차별은 우리의 정신이 아닌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만 우리 모습은 그렇기에…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 미쉬나는 구약의 율법을 바리새파 랍비들의 다양한 해석과 가르침으로 기록한 문헌이며 유대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