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vs 어리석음

잠언 9:4-6, 16-17
4-6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Leave your simple ways and you will live; walk in the way of understanding. Let all who are simple come in here! she says to those who lack judgment. Come, eat my food and drink the wine I have mixed.”

16-17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Let all who are simple come in here! she says to those who lack judgment. Stolen water is sweet; food eaten in secret is delicious!”

누군가 인생은 B.C.D라 했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는 언제나 선택 (Choice)가 있다는 말이다. 뇌과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인 하루 평균 적게는 70개 많게는 150개 정도의 크고 작은 선택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년에 약 25,000개에서 55,000개의 선택을 내린다는 말이다. 그중 후회하는 선택은 얼마나 될까? 흥미롭게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많은 경우가 후회할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롭고 바르고 옳으며 뜻깊고 성공적인 선택을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본문은 두 여인이 행인들에게 외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한 여인은 지혜의 여종이고 또 다른 여인은 미련한 여인이다. 두 여인 모두 성 높은 곳에 앉아서 행인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목 놓아 외치고 있다. 그들의 말을 언뜻 들어서는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양쪽 모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며 서로 자기에게 오라고 초청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 않지만, 결과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전자를 선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생명과 명철이지만, 다른 한쪽은 죽음과 무지다.

우리는 삶 속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 두 여종의 외침을 듣는다. 두 여종은 개인의 가정에서 흐르는 전통, 학교나 종교에서 배우는 지식, 다양한 문화 등을 통해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 우리는 양자택일의 길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지혜로운 여종을 택하고 어리석은 여종을 거부하기 위해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두 능력의 핵심은 9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지혜로운 선택을 돕는 두 개의 여과장치를 제공한다. 하나는 분별력(Discernment)이고 다른 하나는 통찰력(insight)이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본질과 비본질, 용기와 객기 등 분별력을 요하는 일들이 참 많다. 이를 위해선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를 볼 수 있는 직관적/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결여된 자는 쉽게 속고 근시안적으로 판단하며 거짓에 미혹되어 결국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분별력과 통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두 여인의 외침이 표면적으로 매우 비슷하듯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또한 외적으로 무척 흡사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선택을 내리든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훗날 부메랑이 되어 나를 칠 일이나 말을 절제할 수 있다.


경외심을 상실한 자는 당장 눈앞에 있는 도둑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지의 여부가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서 성공으로,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매사에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는 성도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호사와 판사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For you have upheld my right and my cause; you have sat on your throne, judging righteously.”

법(Law)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와 같은 작품의 소재로 자주 사용된다. 법이 가진 힘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특유의 복잡성을 활용하여 인생과 사회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는 독자나 시청자에게 희열과 쾌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입장으로 관람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본인이 법정 싸움에 휘말린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실제 법정 싸움을 경험해 본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 과정이 피를 말린다고 한다. 막대한 비용과 복잡하고 느린 진행 속도 그리고 온갖 변수로 인한 불안감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이는 법정에 서 본 경험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유는 꼭 법정에 서지 않더라도 가정, 학교, 일터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판단 받는 자리에 서는 것을 피하려 노력한다. 언사를 조심할 뿐 아니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변호와 해명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불필요한 눈치를 보고 사고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 많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오늘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변호사이시고, 하나님만이 재판관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상세하게 말해도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없으며, 오해를 피하기도 어렵다. 오늘은 동지였다가 내일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인간의 깊은 마음의 동기를 파악하고 변호할 수 있는 분이다. 주님은 오직 정의와 공의로 재판하신다. 하나님께 상담과 변호를 맡기며, 그의 판단에 순응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선악 간에 판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가? 무릎을 꿇고 성령을 구하라. 친히 찾아오셔서 위로와 상담을 제공해 주실 것이다. 나아가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보상과 처벌이 이뤄져야 하는지 그 상황에 대한 판결 또한 내려 주실 것이다. 용서를 구해야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할 수도 있다.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인내로 버텨야 할 수도 있다.

어떤 판결이든, 하나님의 판결은 언제나 선하고 옳다. 그의 판결에 믿음과 용기로 순응하면 자유와 평안 그리고 화목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를 변호하시며 동시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참된 의의 길을 걷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