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의 호모 데우스(Homo Deus)

2016년, 1월에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회장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ICBM 기술 즉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수집한 데이터를 클라우드(Cloud)에 저장하고 빅데이터(Big Data) 기술로 분석, 적절한 정보를 모바일(Mobile)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세계는 또 한 번의 새로운 변화를 인식하였다.

이듬해 2017년 이스라엘 철학자 유발 하라리는「호모 데우스, Homo Deus」(신적 인간)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다음 목표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아닐지라도 현재의 인간보다는 월등한 존재로서 기아, 역병, 전쟁의 위협을 종식하고, 나아가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과 평화를 획득한 오직 신(神)만이 가지고 있는 ‘영원불멸’로 바라보았다.


물론 이는 신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인공지능 기술과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로봇이나 컴퓨터와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막강한 존재로 업그레이드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2021년 4월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는 기후 변화로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가뭄이 계속됨에 따라 최소 2,500만 명의 사람들이 치명적인 기근에 직면하며,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에 대한 인도주의적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202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COVID-19로 세계적 대유행을 뜻하는 ‘팬데믹’을 선언했고, 22년 11월 10일 기준 660만 이상의 사망자를 기록하고 있다.


설상가상 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1세기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을 잃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에 전 세계는 경제적 피폐와 정신적 절망감,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도,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기술 인본주의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데이터교라는 신흥 종교가 세워지고, 이 종교의 성직자가 ‘호모 데우스’이다. 호모 데우스는 과학 기술을 통해 진화한 새로운 인류, 이른바 포스트 휴먼(Post-Human)이다.


호모 데우스에게 영원불멸과 같은 신성(神性)을 부여한 건 인공지능, 알고리즘, 빅 데이터와 같은 첨단기술이다. 혹자는 인공지능에는 계산을 가능케 하는 지성만 있을 뿐이지, 욕구와 감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인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욕구와 감성마저 과학 기술로 재현할 수 있다면?, 심지어 그것을 인간보다 더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인류가 그들에게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예를 들어 지난 9월 3일 CNN 등 외신에 따르면,‘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디지털아트 부문에서‘스페이스 오페라 극장’(Theatre D’opera Spatial)이 1위에 선정되었는데, 이는 제이슨 M. 앨런이 AI로 제작한 작품으로 화가의 단 한 번의 붓질조차 없이 AI 프로그램을 통해 생성된 작품이다.

잠시 후면,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어떤 프로그램의 작동을 거쳐서 특정한 선택을 내리는지, 인간은 가늠할 수도 없고, 단지 해석해나갈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인공지능이 그리는 미래를 불확실성의 두려움 속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코헬렛의 신학 :‘하나님 경외’
전도서에서 코헬렛도 그가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현세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나는 어디에 있는가?(전 1:4). 이런 출발은 인간적인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관찰하고 있으며, 이러한 숙고의 결과로 코헬렛은 인간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삶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들(특히, 전 1:2, 14; 2:11; 3:16; 7:15, 20; 8:14; 9:11~12 등)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러한 회의적 생각은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3),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서 코헬렛은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서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며(전 3:1-8),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고 확정됨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 3:11a)라고 말함으로,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다룰 수 없음을 언급한다. 그래서 코헬렛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다”(전 3:11b)는 결론에 도달한다.


특별히 전도서 3: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하나님 경외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나온 결과들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하나님 경외’는“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와 같이 반 인과응보적인 현실을 지적하며, 오히려 이러한 현세에서의 성공, 먹고 마심과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전 2:24; 3:13; 5:18)인 종교적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이 인간 사회와 연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세상에 불의가 만연한 이유는, 즉 인간이 악을 행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이유는 악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전 8:11). 그러나 코헬렛은 비록 하나님의 심판의 정확한 때를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다(전 3:17a)라는 하나님의 심판 시간이 반드시 도래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특히 전도서의 결론으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는 말씀처럼 하나님 경외는 최후의 심판을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 되는 종말론적인 것으로까지 이해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현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남아있는가? 인간의 지혜인가? 첨단과학인가? 아니면 호모 데우스가 될 그 자신인가? 그러나 코헬렛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는 인생의 한계성과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닌, 죽음을 통해 특징지어지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으며, 그의 지혜와 재물은 영원한 가치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마치 “미래의 기대 안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지혜 자와 우매한 자, 심지어 인간과 짐승 사이에(전 2:14; 3:19) 아무런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를 외치는 듯하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며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또한, 전도서에서 나타나는 죽음 앞에서 인간과 짐승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견해는 인간의 모든 희망과 우월감을 박탈한다.


그 때문에, 인류는 과학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 아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코헬렛은 내세,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그의 관심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코헬렛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넘어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헬렛은 전도서 12:13~14에서 하나님 경외의 가르침에서 죽음 이후의 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생뿐만 아니라 죽음 너머 내세까지도 지배하신다. 즉, 코헬렛의 하나님 경외의 가르침은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에 근거하는 것이다.


코헬렛은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불의함을 경험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 죽음 이후의 의로움에 대한 희망은 그의 하나님 경외에 대한 가르침, 권면과 함께 표현되었다.

전도서에서의 하나님 경외는 두 가지 분명한 특징을 갖는다. 첫 번째는 시간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인류는 인간의 삶의 영역, 즉 인간의 시간 ‘때’(에트) 안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 경외의 의미는 인간의 시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영원’(올람)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로 전도서에서의 하나님 경외는 현세적·윤리적 의미를 뛰어넘어 내세적·신앙적 의미가 있다. 전도서에서의 하나님 경외는 인간 사이의 관계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역사 안에서 함께 호흡하고 계시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도서는 자신들의 지혜를 고찰하고 현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도 못 나가는 사람도 모두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서 먹여주어야지만 살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소중한 지혜이다.

결론적으로 코헬렛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죽음을 생각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명제는, 인생의 삶 가운데 만연해 있는 불의함, 절망감, 불확실성을 경험하였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분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다스림에 인정함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 경외에 대한 코헬렛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즉 하나님 경외는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균형 있게 가질 것을 가르치면서 인생을 값지게 사는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