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평양장대현교회
북한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는 일제가 했던 그 방법 그대로였으나 더 잔혹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명을 내걸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더 이상 북한에서 견딜 수 없어 남쪽으로 피신한 한 목회자는 1948년 북한의 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아~ 북조선! 억울과 원한이 들어찬 그곳! 돌이 떡이라 하고 사심이를 말이라 하는 그곳! 일거수일투족의 자유가 없는 그곳! 부모자식이 서로 믿을 수 없는 그곳! 부부가 서로 포옹할 수 없는 그곳! 친구가 우정을 상대로 할 수 없는 그곳!
도적을 의분의 행위라 하며 양심있는 애국자를 반역자로 규정하며 신탁통치가 없는 독립을 찾는 이를 비애국자라하는, 검은 것을 희다하고 흰 것을 검다하는 불의와 죄만이 하늘에 사모친 그곳!
저~ 무자비한 볼세비키! 무신론자요 유물주의자들의 종교 박멸정책이 실시되는 그곳!
진정한 애국자요 민족 양심이 있고 선량한 국민인 우리 기독교도를 반역자라 하여 무려 3만여 명의 교도를 투옥하고 인생 도살장을 이룬 저~북조선!
우리 동지 허다한 목사와 유위한 기독청년을 아깝게도 희생시키고 있는 생지옥화하고 있는 그곳!
도로의 이름을 레닌가이니 스탈린로이니 하고 부르는 그곳!
남조선의 폭동을 조정하고 혁명을 음모하는 그곳! 남조선의 폭동 주모자를 구제하기 위해 공세를 징발하여 소련군에 감사헌금을 강요하며 소련의 연방화하여 가는 저곳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칩니다”.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수많은 노력
그러나 이와 같은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수많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산정현교회, 장대현교회, 서문외교회, 남문외교회, 감리교회, 남산현교회 같은 대 교회들이 신앙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던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었던 기독교의 중심지 평양에서 종교 탄압에 대한 저항은 가장 강렬했다.
장대현교회 3.1절 행사
민족의 독립운동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장대현교회에서는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정권은 교회가 이 행사가 치루어지는 것을 금지시키고 평양역전에서 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기념집회에 전교회가 참석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 일에 적극 협력한 것은 강양욱 목사였다.
교회가 기념예배 취소는 부당하다는 뜻을 전하며 이에 반대하자 평양시내 교직자들을 체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새벽에 박대선 목사를 비롯 60명을 예비 검속해 3.1절 기념행사의 사전 봉쇄를 기도한 것이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3.1절 기념예배 행사는 장대현교회에서 무려 3,000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소련군과 북한 경비대가 겹겹이 포위하고 금지했으나 필사적으로 식을 다 마치었다.
그 식은 기념식이 아니라 30년 전에는 일제에게 독립을 요구하였고 오늘은 소련공산당에게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조선기독교연맹과 주일 선거 거부 운동
기독교가 김일성정권에 강하게 맞섰던 또 하나의 사건은 1946년 11월 3일에 있었던 일요선거 거부 운동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강제구인과 강력한 통제 속에서도 장대현교회에서 그와 같은 결집된 의지를 보이자 소련은 기독교연맹을 앞세워 북한의 기독교도들을 완전히 제거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 방법으로 소련은 공산당정권을 세우기 위한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 오전에 실시한다는 포고를 내린 것이다. 이 일은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이 주축이 되어 1946년 봄에 출현한 조선기독교연맹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강양욱은 기독교 목사인데다 민족 진영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소련공산당 군정은 김일성의 부탁을 받아 그를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북한의 기독교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연맹은 소련 북한정권에서 계획한 주일선거에 대한 지지성명을 다음과 같이 냈다.
“1. 우리는 김일성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2.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3.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4. 교회는 선거에 솔선하여 참가키로 한다.”
이 성명을 전교회에 강요하자 기독교연맹 가입을 놓고 황해도에서는 가입과 비가입을 둘러쌓고 극단적인 분열까지 발생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기독교인들은 선거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연맹의 가입과 공민증도 거부하며 강경하게 맞섰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거나 혹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타협의 길을 걷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역시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자의 반 타의 반 연맹에 가입하면서 자신들의 존립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성이 강한 평안도 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북 5도 연합노회는 그해 10월 모임을 갖고 1946년 11월 3일의 일요 선거를 반대하는 결의문을 임시인민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북 5도 연합노회 일요(주일)선거를 반대하는 결의문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기독교신도들은 신앙의 수호와 발전을 위하여 다음 5조항의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결정 실시 중에 있사온 바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1.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2.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3.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교회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4.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5.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김일성의 일요 선거에 참가해 타협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적지 않은 교회와 교인들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주일 새벽 시간부터 밤 12시까지 강단을 떠나지 말고 투표에 임하지 말라는 평양신앙동지회 소속 목회자들의 지시대로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평서노회 72개 교회 중 대다수는 주일 선거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김일성 공산당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5도 연합회 소속들은 물론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정치보위부로 끌고 가 고문을 가했다. 1947년 여름까지 북한개신교도의 3분의 1이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했고, 1948년 9월 5,118명이 여기에 가입했다.
강양욱과 이에 동조한 자들은 친근한 목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감언이설로 유인하였고, 만약 가맹하지 않으면 목사는 물론 가족들을 투옥 축출한다고 위협하였다.
이들은 실제로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평양의 이유택 목사, 문경규 목사, 장도신 목사, 평북 정주의 최태규 목사, 선천의 이모씨 등을 투옥시켰다.
5도 연합회가 직영하는 평양신학교 교장 김인준 목사도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옛 캐나다 선교구역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함경도 지역은 별문제 없이 연맹에 가입했고, 기독교연맹에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주로 보수적 전통이 강하고 주일 선거에 불참했던 평안도의 교역자들이었다.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친공과 반공의 입장은 김일성정권이나 기독교 연맹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뚜렷한 차이점을 표출했고, 이와 같은 반공의 입장은 신학적인 입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학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평양의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 역시 공산정권의 강요에 의해 하나의 신학교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인 이성휘 목사는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6.25 전쟁이 발발 후 우익지도자들과 함께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했다.
공산당들은 평양신학교 현관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걸어 놓고 신학생 하나하나를 불러 사상 검증을 한 후, 두 신학교에서 각각 60명 만을 선택, 120명 정도의 학생만을 공부하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 연맹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을 보존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자들만을 남겨 놓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