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이 되도록 아이를 집에서 키운다고 하면 다들 놀라곤 한다. 임신하고부터 어린이집 대기를 걸어 놓아야 한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 우리 동네는 한국의 낮은 출산율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다. 집값이 저렴하고 녹지가 많아 신혼부부가 선호하는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일찍 기관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유년 시절의 따뜻한 추억이 소신 있는 엄마를 만든다
나는 우유부단한 편이다. 그런데 양육에 있어서는 꽤 소신 있는 편이라 나 자신도 놀랄 때가 많다. 오빠와 언니와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과 부모님과의 추억이 이런 소신에 일조한 면이 있는 듯하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니시는 중에도 소소한 추억을 쌓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퇴근길에 사 오신 우리 자매의 머리핀, 12월이면 어김없이 챙기시던 크리스마스 장식들, 퇴근길의 작은 선물들을 보면서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온종일 우리 생각을 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늘 그렇게 챙기셨는지 엄마가 되어 생각해보니 더욱 놀랍다. 아직도 그 머리핀들을 추억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엄마가 구워 주시던 계란빵이나 돈까스 냄새도 기억난다. 특별한 베이킹 도구도 오븐도 없었지만 꿀맛이었다.
자수성가를 꿈꾸며 쉼 없이 일했던 아빠지만 주말마다 가족과의 시간을 위해 노력하셨다. 뒷산 약수터, 팔공산, 휴가 때마다 떠났던 계곡, 채집채를 들고 메뚜기를 잡으러 다니던 들판, 새벽 5시부터 바쁘게 일하셨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다. 그것은 바로 가족 간의 사랑이다. 그것이 정답임을 알기에 나는 흔들림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에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양한 경험은 소신 있는 엄마를 만든다
결혼 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볼 기회가 많았다. 뉴질랜드에서 가족 상담을 공부하며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게 배웠다.
그 과정에는 부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가족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또는 스텝으로 섬기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키우던 독일인 부부, 프랑스에서 자란 미국인 아빠와 독일인 엄마가 아이 넷을 키우던 인상적인 가정, 아빠가 러시아인이고 엄마가 호주인인 러시아 선교사 가족도 있었는데 장녀인 열일곱 샤샤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그들의 호주 집, 멜버른에 갔던 나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네가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치과의사였던 리젯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걸 다 버리고 가다니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거야, 그렇지?” 아프리카의 소녀를 위한 감동적인 모금 운동 영상을 만들자 방송국에서 그녀를 취재하러 오기도 했다.
리젯은 네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꽤 잘하는 여성도 아니었다. 한 번은 샤샤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자, “엄마가 내 니트를 잘못 세탁해서 다 줄여 놓은 적이 있었다”며 웃었다. 자신이 더 집안일을 잘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엄마는 아니지만 소신 있게 살아가는 엄마의 네 자녀는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밝았다.
그런저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간접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저 부부들처럼 키우고 싶다는 것이 소망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환경에서 키우고 싶다, 많이 뛰놀게 하고 싶다, 양적인 시간을 꽉꽉 채우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내 아이의 잠재력과 개성을 지키고 싶은 소망이 소신 있는 엄마를 만든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도 “어린이집을 보내야 사회성이 발달한다.”라며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나는 교육기관을 접하는 시기, 그리고 어떤 교육기관을 접하게 할지에 대해 매우 신중한 편이다. 어린 시절에 듣는 말과 경험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선생님을 따라 놀러 나온 아이들이 보였다. 선생님은 재잘거리며 장난치는 아이들을 타이르느라 분주하다. 서서 그네를 타는 여자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모습도 보였다. 은율이 역시 최근 들어서서 그네를 타며 속도감 있는 활강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 유치원에 다녔더라면 제지당했을 것이다.
여러 명을 전담하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험한 환경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가 다양한 모험을 시도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줄 수 있다. 은율이가 아직은 엄마 옆에 있는 것이 좋다고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을 따라 왁자지껄 골목을 메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야기한다.
“친구들처럼 언제든 유치원에 갈 수 있어. 엄마에게 말해 줘, 알았지?”
소신 있는 엄마라는 제목의 글을 쓰며 기관에 보내지 않은 것을 유달리 강조한 이유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5년 동안 남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이면서 은율이가 ‘가장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한 할아버지가 자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을 붙이셨다. “왜 어린이집에 안 갔니~?” 네 살 은율이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엄마 옆에 붙어있고 싶어서요.”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엄마의 육아관도 저마다 다양하다. 다만 너무 어린아이들을 남들이 보낸다는 이유로 무작정 기관에 위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영·유아기,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소위 대세를 따라가지 않아도 엄마가 소신을 지키고 일관된 방식으로 양육한다면 아이는 안정감을 찾고 행복해할 것이다. 엄마부터 내가 정말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어린 시절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했는지 기억을 되살려보자.
오늘 추억 상자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며 아이를 위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고민해보면 좋겠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엄마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