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지역 일대 선교 역사

원산, 평양 대부흥운동의 성령의 역사는 한국 교회에 몇 가지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첫째 회개운동이었으며, 둘째는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은 영적 갱생을 통해 한국 교회를 정화시켰고, 죄 의식을 더 강화시켜 윤리적인 면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교육 열, 금연, 금주 운동, 우상숭배에서의 해방, 여성의 지위향상, 결혼 및 세계관의 변화 등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시로 변했고, 주일에는 불신자들마저도 가게 문을 열지 못할 만큼 개혁의 분위기가 강하게 조성되었다. 셋째 선물은, 교육에 대한 선교 사역이 놀랍게 확장되어졌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의 수가 보강되었고, 초등학교가 증가하고 주일학교 학생 수도 증가하였다.

부흥운동 후 북장로교 선교회 사역확장 현황

선교사 보강 1908년 22명, 1909년 14명 보강, (부흥 운동 후 43% 보강)
초등학교 115개에서 606개로 증가
주일학교 학생수 17,894명에서 87,117명으로 증가
세례 받은 수1908년과 1909년 11개월 동안 6,500명 이상(27%증가)
목사안수1907년 7명, 1910년 20명 안수,

*교회 수: 1,000개, 세례교인: 25,000명, 전체교인:11만명(1909년, 타 교단 총계; 20만명)의 한국교회로 급신장

복음주의 연합운동 20세기초 한국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을, 양반과 천민을, 형제와 자매를, 원수와 원수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부흥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던 사경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모였고, 강단을 교류하면서 한국의 복음화를 함께 염려하였다.
이 일에 처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선교회는 장로교 선교사들이었으며, 네 개의 선교단체(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가 장로교 공의회(A Presbyterian Council)를 결성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한국의 복음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감리교와의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협력의 여건을 고무시킨 것은 부흥운동과 사경회이었다.

복음주의 연합운동 역사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 발족(장로교선교회, 감리교선교회)
1889년  장로교공의회 결성 (A Presbyterian Council)
1893년장로교공의회 재조직(미주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1895년 성서번역위원회: 사도행전 외 여러 권의 신약성경 시험번역
1900년 성서번역위원회: 신약성경 번역 완료
1903년  원산부흥운동 이후 교파초월, 복음화 목표를 위해 협력. 
1905년 장감연합공의회 결성(The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4개 장로교선교회, 2개 감리교선교회: 주일학교위원회(Sunday School Committe) 임명.
1905년 장감연합공의회: 선교지 코리아 미션필드 설립 
1906년 장감연합공회: 평양숭실대학 공동 운영 
1908년장감연합공회: 합동찬송가 제작, 그리스도신문 발간, 주일학교공과 발간
1909,1910장감연합공회: 백만인구령운동(민족복음화운동), the Evangelistic Campaign.
1910년 성서번역위원회: 구약성경 번역 완료
1914년 장감연합공회: 세브란스병원 공동 운영
1915년 장감연합공회: 연희전문학교 공동설립 운영
1937년 성서번역위원회: 성경 개역
  • 이처럼 성경번역, 예수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설립, 합동 찬송가, 의료사역, 미션 스쿨의 설립과 대학의 설립, YMCA 설립에 이르기까지 연합활동은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조직(7인 목사 장립, 이기풍 제주도선교사 파송)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더불어 이제 한국인들을 목사로 안수해 세워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노회의 설립은 필수적이었다.
미국 남북장로교회 총회가 1905년에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고, 그 해 가을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성장하고 파송한 모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또한 한국적인 토착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세워지는 교회는 복음의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교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에 충실하면서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을 소화하고 계승 발전 시킬 수 있는 그런 성숙한 교회로의 발전을 기대하며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1907년 9월17일 한국인 장로 36명, 33명의 선교사, 찬성 위원 9명 합 78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다.

최초의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일곱 명을 목사로 장립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이기풍을 복음선교사로 안수하고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선교 정신을 처음부터 한국 교회에 분명하게 인식시키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독노회가 조직되던 1907년 한국교회 교세

 교회세례교인전체교인목사장로조사남전도인여전도인
785개18,061명75,968명49명 47명 160명 58명 38명

1907년부터 1942년, 한국교회의 선교 상황(선교사 파송)

   1907년 제주도  이기풍선교사
   1909년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최관홀선교사- 정착한 한인 선교
일본 도쿄  한석진선교사
   1910년만주 간도지방 김영제, 김진근선교사
미국 캘리포니아, 멕시코 방화중선교사
   1912년중국산동성 내양현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선교사
   1917,1918년중국산동성박효원, 홍승한선교사, 박상순선교사
   1919년중국내양 남관김윤식 의료선교사
   1921년중국 평도와 자마현을 편입,  (선교지역 확장)
   1923, 1931년중국 북동부이대영선교사, 길순효선교사(여)
   1932년중국 지마성안중호 의료선교사, 병원개설, 내양과 지마에  학교 설립
   1933년산동성단독노회 설립(내양노회)
   1937년중국 북동부방지일선교사
   1938년중국 청도청도선교구 설립
   1942년중국 지역(35개교회, 세례교인: 1,716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