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제자의 길

교회는 제자들의 모임
예수님의 복음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40일간 하나님 나라 일을 나누신 후 승천 직전 그 현장에 모인 제자들에게 지구촌 모든 족속이 너희가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이므로 그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다(마28:18-20). 이 큰 위임령은 1세기 처음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김없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행되고 있다.

지난 2천여 년 긴 교회 역사 중 그리스도의 이 큰 명령이 활기차게 수행되지 못한 시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성령의 강권적 역사에 반응한 이들이 있어 복음으로 제자 삼는 사역은 지속되어 왔다. 그 시대 교회가 선교 대명에 충실하지 않았던 때는 그들이 현실 세계의 안락에 취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구성된 모임인 것을 망각할 때였다. 자신이 복음을 통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확할수록 그 또한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사역에 충실하게 된다. 반면에 교회를 자신의 현실적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거나 사명을 잊은 이들의 사교 모임으로 전락할 때 즉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큰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제자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이들은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필자의 경험을 나누려 한다. 모 도시에서 사역할 때 어느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Lordship)을 설교했는데 그 주일 이후에 출석을 멈춘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은 그날 설교를 듣고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설교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자신이 그의 명을 따라야 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면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누구도 아닌 자신이 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결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에게 주권을 주고 싶지 않다고 결론지음으로 즉시 교회 출석을 멈추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사람은 교회에 늘 출석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문화나 풍습으로 익힌 종교 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들에 비해 진솔한 반응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측면이 있음을 알고 설교자는 끊임없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정체성을 알게 해야 하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주님의 큰 명령을 수행하는 대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선교는 제자를 찾아 나서는 여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천하만민 땅끝까지(마28:19, 막16:15, 행1:8) 라는 범주를 큰 명령 속에 담으신 뜻은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명을 받은 이들은 누군가 가겠지 가 아니라 내가 가든지 아니면 마땅한 이들을 보내고 지원해야 한다. 필자는 오랜 기간 사역했던 교회의 수요기도회를 미전도종족을 위한 기도 시간으로 삼았다. 놀랍게도 적지 않은 지역 교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저 먼 곳에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을 위한 뜨거운 관심과 간절한 기도를 조금은 특별한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인 교회가 멀리 있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그들에게 깊은 관심과 뜨거운 가슴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교인들이 힘써 행하며 적극성을 보이지만 다수는 소극적이며 매우 더디게 반응하기 때문에 불씨가 잠시 타올랐다 꺼지거나 연속성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필자는 처음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소수 부족들을 두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간절히 기도하였었는데 선교 현장에서 직접 이들-아카족 몽족 리수족 라오족 라후족 등-을 만났을 때 정말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기쁨을 맛보았다. 이들은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복음을 통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주기를 바라고 있다.

끝까지 걷는 것이 중요하다
길을 오래 걸으면 피곤하다. 때로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선교라는 여행길도 끝까지 걸어야 한다. 필자는 요즘 들어 인생의 마지막 십분의 일이 그 전의 십 분의 구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잘 하였어도 마무리가 알맞게 되지 않으면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은퇴 연령이 되었으나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하는 부부를 알고 있다. 보통은 건강한 노후를 위하거나 손주들이 주는 즐거움에 젖어들 연령일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선교지로 이끄는 것일까?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큰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려는 제자로서의 몸부림이 아닐까. 살면서 기도했던 그 영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제는 되었다 하며 멈추는 걸음을 이들은 왜 은퇴라는 단어는 그들의 사전에 없는 것처럼 끝 지점까지 걸으려 하는 걸까? 누군가의 말처럼 쉼은 영원한 처소에서 주님의 품에 안겨 쉬기로 하고 땅에서는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그 시점까지 큰 명령 받은 제자로서 가야만 할 길, 선교여행을 멈추고 싶지 않아 보인다. 필자가 아는 한 은퇴 장로는 말년을 선교지 시골 벽촌에 있는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지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람들이 온갖 생각들을 말할지라도 필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마지막이다. 아마도 생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 주님의 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선교, 소망의 언덕에 함께 오르는 여정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바램이다. 제자 삼는 사역으로서 선교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 약속이 따라온다(마28:20). 주님의 약속에 기반을 둔 발걸음보다 더 확실하고 아름다운 여행이 있겠는가(사52:7, 롬10:15)! 옛이야기 도제에 따르면 장인들은 그들이 전수받은 기술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를 찾고 찾아서 자신이 전해 받은 모든 것을 전수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해 받고 이것을 다시 전할 수 있는 제자를 찾아 나서는 것, 그 제자가 다시 제자 삼는 삶을 살도록 돕는 이 일이 주님의 큰 명령을 실행하는 사역이다(딤후2:1-2)!

비록 수고로움이 심하여 피곤을 타고 지칠 때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소망을 붙잡고 걷기에 마지막 언덕에 이를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이를 도우시는 성자와 성령의 기도가 있고(롬8:26, 8:34 성부는 이 중보를 받으신다!) 이미 올랐고 또한 함께 오르는 이들의 응원이 있다(히12:1). 성삼위 하나님의 구령 역사에 이미 자신의 생을 드린 믿음의 선진들의 응원과 지금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들과 소망의 언덕을 오르는 이 여정은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행복한 여행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도 이 복된 여행에 함께 오르자고 주변의 모든 이들을 청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이 글을 가슴으로 읽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큰 명령에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제자가 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