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渾沌)의 우화(寓話)

남해의 제왕은 ‘숙’(儵)이요,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渾沌)이다. 숙과 홀이 마침 혼돈의 땅에서 서로 만났는데 혼돈의 대접이 매우 훌륭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고자 생각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에게는 모두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구멍이 일곱 개 있는데, 혼돈만이 없으니 시험 삼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었는데, 칠 일이 되자 혼돈이 그만 죽고 말았다.

위 내용은 장자 내편의 마지막인 ‘혼돈(渾沌)의 우화’로 내편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다. 장자는 각 편의 처음이나 마지막 우화로 그의 논증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한다. 장자의 우화는 대부분 시각적이어서 그림처럼 전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직관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1편 소요유의 곤과 붕의 이야기는 내편의 첫 번째 위치에 있으면서 전체를 아우르고, 2 편 제물론의 마지막 우화인 호접지몽은 장자 내편의 중심에 있으며 논증의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마지막 7편 응제왕에서는 혼돈의 우화로 전체 내용을 결론 맺는다. 중요한 점은 이 우화들이 이해의 관점에 따라서 여러 해석을 보일 수 있지만, 각각의 우화가 단편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벽화처럼 전체적인 논지에서 그 텍스트의 의미가 파악되어야 한다.

숙(儵)은 어떤 현상이 재빨리 ‘나타나는’ 의미이며, 반대로 홀(忽)은 현상이 재빨리 ‘사라지는’ 의미로 서로가 양극단을 달리는 상태이다. 혼돈(混沌·渾沌)은 일반적으로 질서가 없는 상태로 그리스어 ‘카오스’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자에게 혼돈은 인간이 아직 그 안에 내재하는 질서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숙과 홀은 남과 북처럼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양극단으로 자신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중앙에 있는 혼돈에게 와서야 비로소 서로 비교할 일이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나은 것을 갖고 있다는 그들의 우월감은 결국 혼돈에게 구멍을 뚫게 되었고 그들의 성심(誠心)은 마침내 혼돈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7개의 구멍은 지각의 근거인 눈, 코, 귀, 입의 ‘감각기관’, 더 나아가서는 호접지몽에서 말한 물화(物化)에 의한 판단과 욕망으로, 혼돈의 죽음은 감각기관에만 근거한 지각으로 완전한 자유의 세계가 무너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반면 혼돈은 구멍이 없으므로 숙과 홀처럼 물화(물질)적 지각을 좇아 바깥일을 판단함 없이 스스로 도와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실상 숙과 홀에게 보이는 무질서함은 혼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혼돈인 셈이다.

장자 내편의 결론이 비극적인 혼돈의 죽음이라 하지만 과연 혼돈은 죽었을까? 장자는 도와 일치한 삶은 결코 손상될 수 없고 죽지 않음을 암시하는데 혼돈의 죽음은 오히려 숙과 홀에 비친 그들의 또 다른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적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받아들이기 힘든 혼돈이었다. 마침내 그들만의 판단으로 십자가에 못 박고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우화에서 예감한다면 필자만의 독단일까?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8장 11절-14절)

코헬렛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역사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현실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과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는 코헬렛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이다.

권력을 가진 이가 약한 사람을 주장하여 고난에 빠지게 하거나 죄를 짓도록 하고, 더구나 하나님의 보응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악을 행한 사람이나 선을 행한 사람들이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기도 전에 죽어서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경우는 전통적인 지혜인 인과응보의 원칙이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선과 악에 대한 공평한 판결이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현실을 보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잘돼야 하고 악인은 잘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악인이 장수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과연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코헬렛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도 가늠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종잡을 수 없는 혼돈이다. 우리 주변에는 상식적, 합리적으로 기대하는 일이 좌절될 때가 적지 않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삶을 즐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착실하나 늘 가난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삶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왜 정의로운 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의한 자가 심판을 받지 않는지 불만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다. 인과응보에 기초한 전통적인 지혜관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모르겠네! 모르겠네! 아무것도 모르겠네!

코헬렛은 전통의 지혜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경험한 세계는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과 달랐다. 이 충돌 현상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인간의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한계 영역으로 장자는 ‘혼돈’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종잡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코헬렛의 외침이 ‘하벨’이다.

‘헛되다’로 번역되어온 ‘하벨’은 전도서 해석의 열쇠로 주요 전략적 위치에서 38번이 사용되며, 책의 본론을 여닫는 틀(Inclusion)인 전도서 1장 2절과 12장 8절에서 본문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말 성경과 여러 번역 성경들은 주로 ‘헛되다’(vanity), ‘무익’(futility), ‘공허’(emptiness) 등 대체로 무가치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벨’의 문자적 의미인 ‘숨’ 혹은 ‘바람’ 등을 은유적 표현으로 보고 그 실제 의미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제어될 수 있는 것으로, “신비스러운” 혹은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육체적, 경험적, 지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상태와 연관된 것으로 코헬렛의 지혜조차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상황을 말하기 위해 ‘하벨’을 사용했다고 본 것이다.

더구나 전도서 전체의 구조를 고려할 때, ‘하벨’의 의미가 결국 ‘하나님 경외’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헛되기’(무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수사학적 논리가 더 정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헬렛은 전도서 전체를 통하여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사태를 경험하며 ‘하벨’이라고 거듭 말한다. 결국 ‘하벨’은 인간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긴장과 모순으로 대변되는, 그러면서 하나님 안에서만 해소될 수 있는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인 ‘혼돈’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 면에서 ‘하벨’은 ‘헛되다’라는 꼭 부정적인 의미만 아니라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경험한 이해하기 어렵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외침으로도 볼 수 있다.

카오스(혼돈)와 코스모스(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연)

코헬렛과 장자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서 카오스를 악으로 코스모스를 선으로 규정하여 코스모스만을 추구하는 이분법적 도식 즉, 인생은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고, 무질서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지혜의 관점과는 다르다.

코헬렛과 장자의 관점에 따르면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은 삶에 자연스러운 배경이 된다. 그래서 장자는 ‘혼돈’을 말하고 코헬렛은 ‘하벨’을 외치지만,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때문에 ‘혼돈’은 악으로 규정되는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닌 아주 자연스러움이다. 이는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하나의 흐름이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혼란이 전제되어야 한다. 단지 인간이 그 변화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고 고통과 혼란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질서를 만들어 가고 세상이 만든 질서가 있다.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있어야 하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야 하는 등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질서를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상태에 머물러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혼돈이 어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 준 것이다.

혼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창세기>와 <요한복음>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그리고 창세기를 상기시키는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을 하나님이 말씀(Logos)으로 질서를 부여해 나가신다. 여기서 말씀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나오는 개념으로 혼돈과 공허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신학에서 혼돈을 창조이자 파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혼돈과 공허에 대한 질서를 인간이 정하고 만들어가는 방식이 아닌 말씀에 의해 즉,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식에 의해 세워지고 실행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탐욕으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카오스) 속에서 질서(코스모스)를 말씀(로고스)으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진리에 이른다면,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종잡을 수 없는 ‘혼돈’의 본 모습을 이해하는 상태가 될 듯하다.

“모든 인간적인 것에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절대 일치하지 않는 분… 처음과 나중, 그 자체로서 알려지지 않는 분, 결코 우리에게 알려진 여러 가지 것 가운데 그것이 아닌 분, 주, 창조자, 구원자 하나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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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