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개신교 선교사의 활동
1884년 9월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Allen)이 인천 제물포 항에 입국하고 일 년 후에 서울에 광혜원을 설립하여 이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고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어 1885년 4월 부활절 아침에 미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제물포 항에 입국했다.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 사업과 문서선교에 치중하였고 아펜젤러와 함께 삼임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해 1910년에 신구약 성경 번역을 끝내고 그 후에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잃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85년 5월에는 스크랜톤이, 6월에는 헤론이 입국하여 선교를 개시했다.
황해도 송천 소래교회 헌당예배
이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입국하여 부산 지역을 선교했다. 1892년에는 남 장로교, 1896년에는 남 감리교,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미 10년 전에 캐나다 출신 게일 선교사가 독립적으로 황해도 송천과 부산에서, 후에는 원산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고 이때 하디(Hardie) 선교사도 원산에서 함께 사역을 하였다.
또한 캐나다 출신 독립 선교사였던 메켄지(Makenzie) 선교사는 1893년 황해도 송천(소래)에 정착하였다. 메켄지 선교사의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1895년 7월에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소래교회 헌당예배를 드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지는 황해도를 무대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 기독교가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 펜윅(Fenwick) 선교사에 의해 1889년에 원산을 거점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1895년에 미국 보스턴의 클라렌톤 침례교회에서도 7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부산과 충청도 공주에서 1900년까지 선교를 하였다.
1896년 10월에 미 남 감리교가 서울에서 윤치호의 협력으로 서울에 거점을 마련하고 주로 경기도 북부인 송도와 개성에서 선교를 하였다.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도 1907년에 한국 선교를 서울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작하였다. 구세군은 1908년에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최초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주로 선교한 지역은 서울과 황해도 소래, 강원도 원산, 부산, 경기도 송도와 개성, 충청도 공주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미 출신의 선교사들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일고 있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복음에 대한 열정이 투철했고 연합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선교지의 난관을 극복하고 조선에서 기대했던 이상의 선교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늦게 한국 선교를 개시한 타 교단도 역시 개인의 중생 경험과 인격적 신앙고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맥을 같이 했다. 이에 대해 박용규 교수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 ‘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실로 이어져 1897년에 세례교인은 777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정부의 금교령에 불구하고 순회전도 시행
1888년 한국 조선 정부의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순회전도 선교정책을 수행하여 복음전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887년 언더우드는 송도, 소래, 평양, 의주로 순회 전도여행을 가졌으며 이때 의약품과 서적들을 나누어 주고 소래에서 7명을 포함하여 2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88년에 아펜젤러는 원주, 대구와 부산 등지를 순회하였고, 1891년에는 사무엘 마펫이 게일과 함께 평양, 의주, 만주의 봉천과 함흥까지 전도여행을 가졌다. 의주와 평양과 소래는 타 지역에 비해 선교사들의 순회가 잦고 비교적 두드러진 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평양에 대한 관심과 첫 성찬식
특히 평양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깊었다. 1887년 북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해 가을 언더우드는 평양과 의주를 방문하였다.
1888년 아펜젤러는 다시 스크랜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1890년 서울에 도착한 마펫은 8월에 아펜젤러와 헐버트와 함께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마펫은 그 후 대동강을 통해 황해도로 해서 소래에 들렸다. 이곳은 전에 게일 선교사(1889년)와 펜윅 선교사(1891년~1893년)와 메켄지 선교사(1894년)가 선교 활동한 지역이었다.
“1891년 게일과 마펫은 송도, 평양, 의주, 목단에 이르는 압록강과 그 이상을 넘는 1,400 마일의 긴 전도 여행을 떠났으며, 이후 마펫은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할 계획을 세웠다. 1893년 평양 대동강변에 정착한 마펫은 그해 10월 복음을 전해 들은 22명을 대상으로 첫 학습반을 조직하여 성경과 기독교 기본교리를 가르치고, 그 이듬해에 일곱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평양에서는 처음으로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이 일곱 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길선주와 그의 친구인 김종섭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평양 최초 널다리 교회 창립
평양의 한국인들과 접촉점을 삼은 것은 사람들이 쉽게 모여드는 ‘사랑방’ 이었으며 이곳은 확실한 전도 장소였다. 이 사랑방에서 복음을 접하게 되어 세례자들에 의해 평양 최초의 널다리 교회가 창립되었다. 또한 1892년부터 시작된 감리교 의료 선교사 홀 박사와 동일한 의료선교사인 헌터 웰스와 그래함 리 선교사의 선교사역도 평양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청일전쟁 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 당시에 북감리교 홀 선교사는 평양에서 진료 사역과 교인 지도 및 예배 인도하는 일로 헌신하였고, 북장로교의 마펫과 남 장로교의 Tate는 평양에서 주민들에게 식량과 필수품을 보급해 주며 복음을 전했다. 이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선교사들의 헌신에 감동되어 복음은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의주, 평양, 소래 관서지방의 급속한 복음의 확산
의주, 평양, 소래 등 관서지방에는 놀라운 속도로 복음이 확산되었고, 한국 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전국적으로 42개의 신앙의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복음이 의주, 평양, 소래에서 확산되고 있었고 또한 같은 시기에 원산과 인천에서도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복음이 한국인에 의해 확대되어야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은 영적 결실들을 관리할 한국인 순회 전도사들을 먼저 임용한 후에 훈련시키는 과정을 취했다. 북장로회 선교회는 1892년 전도 구역을 세분하여 의주 전도사 김관근에게 평안북도 일대를, 평양 한석진에게는 평안남도 일대를 전도 구역으로 맡겼다.
제1회 선교사 공의회 10개 선교정책
“존 로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여 선교의 결실을 맺었고, 이들이 다시 선교사들의 조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한국인들에 의한 복음전도를 그 근간으로 삼았다.
그것은 1893년 제1회 선교사 공의회가 한국 선교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채택한 10개의 선교정책 가운데서 잘 나타나 있다. 노동자계급에 우선 전도할 것, 가정주부의 개종을 중요시할 것, 지방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할 것,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유의할 것, 성서번역에 힘쓸 것, 모든 종교 서적을 한글로 출판할 것, 자급 자치의 교회를 만들 것, 신자는 누구나 전도자가 되게 할 것, 의료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환자를 감화시킬 것, 지방 환자의 경우 왕진의 기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할 것 등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교정책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오래전에 선교사들이 정했던 이러한 선교정책은 앞으로 통일 후에 북한지역에 적용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필자는 판단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