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열쇠로서의 죽음에 대한 사유

전도서의 코헬렛은 삶의 참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열쇠를 찾고자 “해 아래”에서 행하는 인간의 수고와 인생의 삶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묻고 있다. 이것은 코헬렛과 장자의 관심 대상이 초월 세계나 사후 세계가 아닌 현재 진행되는 삶에 대한 것이며,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차이점부터 먼저 말한다면 장자와는 달리 코헬렛은 그 누구도 해 아래의 인생에서는 그 열쇠를 찾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킴으로 참된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장자의 절대적 자유 혹은 지인(至人)이나 신인(神人)의 무위자연의 경지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3:11) 안에서만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 어떤 인생 철학이나 경험 혹은 뛰어난 자아 성취라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에서도 참된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러한 부분의 성급하고 편향된 결론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자칫 현재의 우리의 삶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게 만든다.

이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생활처럼 보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세속적으로 여겨지는 일상의 삶 속에서 누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맛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런 의문들은 때로는 ‘인생의 허무’를 논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일상을 포기하는 염세적인 신앙과 철학에 빠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해 염려조차 할 필요가 없이 마음껏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쾌락주의(Hedonism)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그와 반대의 현상으로 인생을 냉소적으로 비관하거나 허무주의(Nihilism)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코헬렛과 장자는 그렇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결론을 염세적인 철학이나 신앙으로 유도하거나 성도의 일상의 삶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코헬렛)의 말씀이라”를 책의 제목으로 본다면 청자들이 듣게 되는 코헬렛의 첫 외침은 2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전도서 12:9~14를 전도서의 에필로그로 본다면, 코헬렛의 마지막 결론 역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벨 하바림 하콜 하발림)임을 알게 된다. 전도서의 처음과 마지막에 만들어진 이 수미쌍관 구조가 의도하는 바는 곧 전도서의 모토(motto)인 ‘모든 것의 헛됨’이다.

연이어 코헬렛은 전도서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2:11, 22; 3:9, 5:16, 6:11) 되풀이되는 질문인 전도서 1:3의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는 인간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층 더 깊은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는 코헬렛의 던지는 참된 삶의 의미와 또한, 이러한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코헬렛은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모든 것이 헛되다’는 모토를 전제하지만 그로 인해 앞서 언급했듯이 염세적 신앙인 허무주의나 쾌락주의가 아닌 해 아래인 현실에서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러한 의미 있는 삶의 근거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개념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다.

즉 죽음을 직면한 채 살아가는 삶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통하여 삶의 기쁨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표면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 두 사상을 연결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를 주장한다. ‘모든 것의 헛됨’이라는 삶의 허무함과 ‘카르페 디엠’의 삶의 향유는 ‘해 아래 인생의 삶’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축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강화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
전도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장 바깥 틀을 이루는 ‘모든 것의 헛됨’(1:2, 12:8)이란 선포에 주목하며, ‘인간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인가?’란 질문에 대해 코헬렛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전도서 사상의 한 축으로서 핵심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전도서 전체를 감싸는 또 하나의 내부적 틀을 만들어 내는 두 개의 탄식(혹자는 노래로 표현한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두 탄식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어떤 비슷한 분위기를 말하는데, 그것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겐 결정적인 ‘죽음의 그림자’이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전도서 1:3의 “해 아래”와 전도서 12:7의 “땅”으로 언급된 제한된 공간적 개념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 공간성은 전도서 전체의 내용과 사상을 ‘이 땅 위에 그리고 해 아래의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으로 시·공간을 분명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존재가 갈급하는 유익은 왠지 중동 이스라엘 광야의 더위와 목마름이 연상되는 뜨거운 ‘태양(해) 아래서’ 인간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땅에 땀을 흘려야만 움켜쥘 수 있는 ‘바람’으로 형상화되는 듯하다.

인간의 유한함과 그의 한계에 대한 두 개의 탄식
만물의 탄식(전도서 1:4~11)에 숨겨진 사상은 실제는 그렇지 않음에도 영원해 보이는 만물과 유한한 인간 사이의 대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끊임없이 ‘가고 오는’ 동적인 인간의 세대와 ‘영원히’ 서 있는 땅의 대비(1:4)가 나타난다.

하지만 땅의 정적은 곧 바로 해, 바람, 강물(1:5~7) 등의 영원히 이루어지는 듯한 순환적인 움직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해 바람 강물의 개념은 동일한 ‘가고 옴’의 움직임을 갖으나 그 주체는 영원하지 못한 인간 세대와 대조된다.

하지만 이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코헬렛은 결론짓는다(1:9, 10). 새로움이 없고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틀의 한계가 자연법칙이든 아니면 일종의 질서이든 만물은 근본적으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코헬렛은 전 1:8a의 모든 만물의 피곤함을 언급하는데, 만물의 피곤함은 영원성과 동시에 그 한계성을 드러낸다.

9절의 ‘해 아래서 새것이 없음’을 ‘이미 존재했던 것, 그것이 다시 존재하게 될 것’으로, ‘이미 행해졌던 것, 그것이 다시 행해질 것 으로 ’표현함으로, 변하지 않는 땅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나, 세대에서 세대로 변하는 인간에겐 만물의 연속되는 동일한 행위가 마치 새것인양 인식되는 사실에서 인간의 유한함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전도서 1:10의 “보라 이것은 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의 이전 세대들에 있었던 것이라고 반박하며, 영원해 보이는 땅이란 무대 위에서 한 세대만을 살고 없어지는 유한한 인간의 애절한 절규를 토해내게 한다.

이처럼 ‘만물의 탄식’에는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영원한 땅과의 대조를 통해 드러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과 후대에 의해 기억됨이 없는 인간의 모습에서 어떻게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죽음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화와 죽음의 탄식(전도서 11:9~12:7)은 좀 더 직설적으로 창조의 생동감과 인간의 노화와 죽음으로 인한 유한함과 한계를 드러낸다.

전도서 11:9과 12:1에 등장하는 청년은 12:5의 애처롭게도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길에서 놀라는 쇠약한 노인이 자신의 영원한 집(무덤)을 향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과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11:9에 등장하는 청년에게 향한 여섯 개의 명령문인 “즐거워하라”, “행하라”, “알라”, “떠나게 하라”, “멀리하라”, “기억하라”는 단어들은 “너의 청년의 날들”로 한정된 때 안에서 청년의 생동감과 자신감 그리고 절제를 경고하고 있다.

반면에 쇠약해지는 ‘육체 속에 갇히게 되는 인간’의 모습은 왕성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점차 ‘차단되고 격리되는 집’에 비유된다. 특히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지고, 이가 적어져서 씹는 소리조차 잦아드는 인간의 쇠락과 더불어 자연의 생장과 팽팽한 생명력이 다시 한번 대조되어 묘사된다.

연이어 12:1의 생동감이 넘치는 “너는 청년의 때”(젊음의 날)와 대조되는 “곤고한 날”(악한 날)은 독특한 히브리어 표현인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의 어두워짐’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현상인 ‘비 뒤의 구름의 몰려옴’과 더불어 무언가를 움켜쥐던 손이 마치 금 그릇을 붙들고 있었던 은줄이 풀어지고 힘없이 깨어지듯(12:6) 쇠락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 무덤에 묻힌 인간에게는 그 존재의 경계 밖에 있으므로 의미 없는 그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은 그칠 줄 모르며 우물의 도구들인 항아리와 바퀴마저(12:6) 파괴되는 쇠락의 늪으로 몰아간다. 결국엔 인간의 육체는 원래 그러했던 것같이 먼지로서 흙(땅, 12:7)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

코헬렛은 거부할 수 없는 시간성으로 인간을 대면하고 있는 죽음의 엄중한 분위기에 오히려 인간이 창조되던 최초의 그 순간을 접목한다.

그럼으로써 쇠락해져 가는 인간의 최후 단계의 모습에 오히려 창조의 첫 순간에 대한 회상을 불러일으켜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라는 명령으로 다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구조를 통해서 창조의 생동감과 인간의 쇠락함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결론적으로 죽음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분명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전도서 전체에서 핵심적인 두 사상인 ‘모든 것의 헛됨’과 ‘카르페 디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의 본분으로 연결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과 관련하여 제시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원하심이다. 특히 명확하게 제시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비는 ‘영원’의 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영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나 그것의 불가능함을 깨달음으로써 죽음에 대해 더욱 강화된 자각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헛됨’이라는 모토 이외에 전도서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반복(2:24~26, 5:18~19, 8:15, 9:7~10)되어 강조되는 ‘삶에 대한 기쁨’ 즉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바로 이 자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삶을 향유하는 즐김과 만족의 삶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부터 주어지는 ‘몫’에 기반을 둔다. 창조로부터 설정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지 못한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주권성은 둘 사이를 분명하게 가르고 구분되게 하며,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모티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의 한 소절로 글을 마무리해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