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소요유(逍遙遊) – 절대 자유의 경지

“북쪽 검푸른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이 붕새의 등 넓이 또한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온몸의 힘을 다해 날면 그 활짝 편 날개는 하늘 한쪽에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은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大風)이 불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天池)를 말한다.”<소요유 1>

이는 <장자>의 첫 번째 편, 첫 이야기이다. <장자>에서 장자의 중요 사상인 자유(自由)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중 하나인 소요유(逍遙遊)는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소요유는 노닐 소(逍), 노닐 요(遙), 놀 유(遊)의 문자적 의미인 ‘바람에 따라 나부끼는 깃발의 끈과 같이 얽매이는 바가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즉 장자에게 있어서 소요유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정신을 말한다.

원래 곤(鯤)은 ‘작은 물고기’나 ‘알’을 뜻하는데 우화(寓話)의 형식을 빌려 몇 천 리의 큰 물고기로 등장하고, 이것이 또 전설 속의 큰 새인 붕(鵬)으로 변하여 비상하였다. 여기서 붕(鵬)은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이것이 날아올랐다 함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인식의 초월(超越)을 상징한다.

바닷속에 갇혀 살아가던 물고기가 바다라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처럼, 인간 또한 현실의 속박에서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보통 사람의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로 우리의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세상을 새로이 인식하도록 하면서, 가장 먼저 인간이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을 ‘화이위조’(化而爲鳥)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에덴동산?
장자에게서 소요유, 즉 절대 자유 경지의 주체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들이 소요하는 곳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 한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붕이 날아간 남쪽 바다(南冥)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이란 뜻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도 하다. 장자가 ‘무하유지향’을 권하는 것은 자신의 좁은 편견인 성심(成心)에 사로잡혀 이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모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인간 세계의 독단과 편견을 제거하려는 의도이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의 철학은 모든 성심에서 벗어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함으로 소요유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다란 나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 커서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탄하는 친구 혜자에게 그러한 제한된 관점에서 시비(是非)하는 마음이 없이, 무위(無爲)하며 소요(逍遙)하라 권하며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의 제한된 이성적 사유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것에 집착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초월함으로 새로운 세계와 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장자가 꿈꾸는 ‘무하유지향’을 그대로 그려낸다. 최초의 죄를 짓기 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정신은 피조물로서 인간 최고의 경지이며, 모든 구속과 차별, 가치를 넘어선 절대 자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단 동산 중앙의 선악과 열매라는 단 하나의 금지 외에는 어떠한 구속이나 속박 없이 자유롭게 지내며, 장자가 말하는 천지만물과 합일하여 모든 욕구와 욕망이 달성된, 혹은 그 의식조차 없는 정신적 절대 자유를 누리는 상태였으리라 유추해 본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동물들을 그 앞으로 데려갔을 때 서슴없이 그 특성대로 이름 짓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장자의 ‘무하유지향’을 구약 성경인 이사야에 묘사는 말씀이 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6~9).

무기(無己) – 자기부인(自己否認) 자유의 세계, 즉 ‘무하유지향’에서 노닐기 위해서는 정신세계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장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다름 아닌 너무나 견고해 보이는 ‘나’라는 자아의식이라고 보았다. 장자는 이를 성심(成心)이라 하였다.

일상의 ‘나’라는 자아의식은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비교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상대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끼면, 매미와 비둘기처럼 먼발치에서 비웃기에 바쁘다.

따라서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충실한 소요유의 주체를 형성하는 인간의 자세는 무기(無己)이다. 무기란 자기중심의 주관적인 판단 의식과 부귀공명에 속박되는 자아를 버리고, 자기의 정신이 물질세계의 인위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적인 삶을 말한다.

그것의 전제조건은 상아(喪我)와 좌망(坐忘), 심재(心齋)이며, 이것들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부정의 정신을 말해 준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인간을 구속하는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움과 해방이 소요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듯하다.

장자의 무기(無己)와 같은 언어들이 유독 눈이 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말씀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보편적인 제자로서의 부르심인 제자도(弟子道)를 제시하는데, 위의 마태복음과 병행 구절로 그 첫 번째가 바로 자기 부인이다(마가복음 8:34).

인간은 누구나 자아(성심成心)를 가지고 있다. 즉 자기가 자신 삶의 주인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짐을 말한다.

자기 부인이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된 자아, 거짓된 자아를 먼저 내려놓아야 참된 자유로 나아 갈 수 있다고 본다.
장자가 말하는 자유를 위한 무기(無己)와 어딘가 닮은 듯 다른 의미, 혹은 어딘가 다르지만 같은 의미인지 고민해 볼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자아는 그렇게 쉽게 내려놓아지지도,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코헬렛의 절대 자유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
코헬렛도 장자가 가장 먼저 ‘화이위조’(化而爲鳥)를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말하듯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코헬렛이 창세기의 창조신학을 근거로 삼고, 그것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전도서 곳곳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인간 존재와 그 생명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하나님 행위의 결과물이며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창조신학적 관점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6~2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a),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도서 12:7).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그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안에 참된 자유와 지식, 의와 거룩 등 하나님의 속성이 내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장자가 이루고자 한 절대 자유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지난 회에 언급한 하나님에게 속한 속성(우주 근본으로서의 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짐으로 인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이에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자유의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함에도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린다는 점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하는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장자의 자유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로 전환한다면 이는 죄로부터 해방, 전도서의 언어로는 ‘헛됨’(허무함)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로마서 말씀에 잘 정의가 되어있음을 본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로마서 8:20~21)

코헬렛과 장자가 추구하는 자유는 차이점이 있지만, 두 지혜자의 근본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이 세계’와 ‘나 자신’ 밖으로 눈을 돌려 ‘무기’를 통한 ‘무하유지향’ 또는 ‘자기부인’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인생은 삶의 중심을 자기부인을 통한 그 무엇에 두어야 한다고 두 지혜자는 말한다. 이것은 참된 의미의 자아를 찾기 위해 자아를 초월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주장처럼 들린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