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율이가 네 살 때 북서울 꿈의 숲 공원 나들이를 둘이서 자주 갔다. 사슴도 볼 수 있고 놀이터도 있어서 은율이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었다.
여름이라 무척 더워서 공원 안 식당에 밥도 먹을 겸 들렸다. 밥을 먹고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식당이랑 연결된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면대 옆에는 스테인리스 수건걸이가 있었는데 은율이가 그걸 손으로 잡고 돌렸다. 쇳소리가 나며 소름이 돋았다.
“은율아, 하지 마.” 그러자 은율이가 나를 빤히 보며 다시 끼익하는 소리가 나도록 수건걸이를 돌렸다. 평소의 나 답지 않게 화가 치밀어 마구 화를 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언성을 높였다.
은율이는 기가 푹 죽고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다. 짐을 챙겨 나오며 이성을 찾은 나는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이를 업고 공원을 걸었다. 은율이가 그날 입었던 옷, 공원 어디쯤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엄마가 미안해. 은율이는 아직 어리고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라 그런 건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엄마가 그 소리가 싫다고 혼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줄 수 있어?”
나의 사과에 대한 딸아이의 반응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은 데 대한 기쁨이 그 조그마한 얼굴에 가득했다. 분명 감동한 듯 보였다. 아이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몹시 놀랐다. 은율이는 두 팔로 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성장해갔다.
아이란 존재는 얼마나 함부로 대하기 쉬운가. 얼마나 무시당하기 쉬운가. 요즘은 아이들 천국이라지만 과연 그럴까. 아이들은 전두엽의 발달이 완성되지 않아 감정조절이 어렵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가 떼라도 쓰면 “그러지 마!”라는 소리로 눌러버리곤 한다.
아이들도 인격체다.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말은 그의 감정을 존중한다는 말과 다름없을 것이다. 감정은 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공감해주는 것은 아이를 존중하는 가장 바른 방법이다.
이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조건 없이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는 불같이 화를 낸 엄마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엄마여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용납받았다.
아이의 욕구를 존중해주자
이번에는 아이의 감정을 잘 읽어준 이야기를 하나 하려 한다. 요즘에는 놀이방이 있는 식당이 많다. 아이들을 그곳에 풀어놓으면 처음 만난 아이들끼리 금새 친해져서 신이 나 논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와서 “이제 가자.”하면서 함께 놀던 친구를 데려가면 서운해 한다.
은율이가 22개월이던 어느 날, 친정 언니와 우리 세 가족은 놀이방이 있는 동네의 한정식집에 갔다. 은율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재밌게 놀았다. 식사를 마치고 은율이를 데리러 갔는데 은율이는 미끄럼을 쳐다보며 가기 싫어했다.
나는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다 했으니 그만 놀고 가야 하는데 얘가 왜 이러지?’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은율이 입장에서 보자면 ‘몰입해서 놀고 있다. 한창 신이 나는 참이다. 그런데 엄마가 밥을 다 먹었다고 재미있는 흐름을 딱 끊고 가자고 한다.’ 모든 것이 어른들 위주이다.
남편과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밥 다 먹었다고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한테 인제 그만 가자고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저렇게 신나게 노는데.” 다행히 남편도 언니도 아이의 감정을 잘 이해해 준다. 아이들 심리에 관심이 많은 언니는 은율이의 세심한 감정을 엄마인 나보다 더 잘 이해할 때가 있다.
우리는 은율이와 좀 더 놀았다. 한참을 놀 줄 알았는데, 10분 정도 더 놀더니 은율이는 먼저 집에 가자고 했다. 두고두고 그때 그렇게 해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에게 있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끊임없이 아이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은율이를 키우며 ‘미운 네 살’, ‘미운 세 살’ 같은 것을 경험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떼쓰는 아이, 부모가 만든다
아이들이 왜 고집을 피울까? 나는 어른과 아이의 힘겨루기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이들은 논리나 힘으로 상황에 맞서거나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고집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떼쟁이나 고집쟁이로 키우지 않으려면 아이가 건강하게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놀이터에서 더 놀려는 아이를 무작정 데리고 가면 아이는 보통 고집을 부리거나 큰 소리로 운다. 그러면 부모는 얘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니 온종일 놀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에 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릴 때 힘겨루기에서 지면 앞으로 더 힘들어지겠다 싶어 더욱 단호해진다. 그러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감정을 무시 받은 아이는 고집쟁이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아이가 무언가를 사 달라거나 더 놀고 싶다고 할 때 “안 돼”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뭔가를 조르는 법이 별로 없고 과자를 사도 가장 좋은 것 하나를 고르고는 만족하는 편이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든지 그 마음을 일단 존중해주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이걸 또 사느냐, 얼만지는 아느냐, 집에 많지 않느냐.” 잔소리하며 아이의 손을 끌고 나와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욕구의 좌절을 겪음므로 지나치게 순종적인 아이가 되거나 반대로 떼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설령 원하는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아이를 존중하는 대화를 나눈다면 아이는 감정에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할 때 그 바람이 더 강하다. 불순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 대상 자체가 좋은 것이다. 싫을 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의 감정을 소중히 다루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인식하는 어른으로 커갈 수 있다.
야누슈 코르차크(폴란드의 의사이자 교육가, 아동문학가)의 시는 내 평생 육아 모토가 되었다.
당신은 말합니다.
아이들은 정말 피곤해.
당신 말이 맞습니다.
당신은 또 말합니다.
아이들에겐 눈높이를 맞춰줘야 한다고.
키를 낮추고,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쪼그려 낮춰야 한다고.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피곤한 게 아닙니다.
아이들의 감정의 높이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피곤한 겁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몸을 쭉 펴고 길게 늘여, 발끝으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